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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4-03-05 조회수125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여쭤봅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까지 해야 하느냐고. 그러고 나서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한국어 성경 말씀 뉘앙스만 가지고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떤 연유에서 일곱 번까지라고 한계를 설정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베드로 사도는 아마도 추측하건데 일곱 번 정도까지만 용서를 한다고 말씀을 드려도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잘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까지' 가 아니고 '까지라도'입니다. 이건 영어의 양보구문과 같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일흔일곱번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까지 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로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문맥상의 액면적인 의미만을 놓고 이해를 한다면 말입니다.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신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의 보통 사람에 불과한 물론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한 인간에게 전해주시는 용서가 가지는 의미를 설명해 주신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일흔일곱은 말은 일흔일곱이지만 실제 상징하는 것은 한계를 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추론할 합리적인 근거가 이미 오늘 복음에 있습니다. 

 

만 달렌트와 백 데나리온이 나옵니다. 만 달렌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율이 77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7과 수학적으로 상대적인 비율로 따지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수없이 이 복음을 봤지만 오늘처럼 이런 수학적인 개념이 숨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처음 해봤습니다. 10년 전에 마산교구 안명옥 주교님께서 말씀피정 마지막 날에 팡세의 도박이론을 수학 극한 이론으로 아주 명쾌하게 단 7분 만에 설명을 해 주셨는데 오늘 그게 생각나 이렇게 비유적인 설명을 드려봅니다 칠판에서 판서를 해 수학적으로 설명을 하면 아주 쉽게 전달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글로 설명을 하려다 보니 조금 힘든 점이 있습니다. 수학적인 개념이 잘 정립된 분이라면 금방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의도가 실제 그랬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저희 인간의 한계를 너무 높이 설정하신 것 같지는 않은가요? 높이 설정하셔도 너무 높이 설정하셨습니다.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설정을 하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멍청하셔서 그렇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그건 아니겠죠. 그럼 인간인 우리에게 왜 그런 설정을 하셨을까 하는 그 의미를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용서는 그냥 쉬운 용서는 용서라는 개념에서 배제를 하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용서와 같은 수준의 용서라면 일흔일곱번이라는 것을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 말씀은 인간이 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의 용서를 말씀하시는 것일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용서를 하라는 것은 이건 용서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힘을 빌려야 그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방법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마치 이런 것입니다. 

 

그제 주일 저녁에 마산 가톨릭 교육관에서 교회사 강의를 들었습니다. 남종삼 순교자의 부인이 창녕에 유배를 왔는데 그당시 그 고을 사또가 남종삼 성인의 문하생이었던 것입니다. 참 난감한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스승의 부인이 되시는 분이 유배를 왔고 또 그것도 대역죄인으로 왔으니 입장이 난감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리 대역죄인의 부인이라고 한들 개인적으론 스승님의 아내인데 보이지 않게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유배온 사람을 그렇게 대우를 한 것은 그 부인 한 개인을 보고 한 게 아니고 스승의 얼굴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용서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거지 그 사람 그 자체를 보면 일흔일곱번이 아니라 일곱 번도 아마 힘들 것입니다. 어쩌면 세 번도 힘들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는 게 그냥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는 게 아닐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라 자비와 눈물의 하느님의 모습을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인간의 말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맞지만 그건 힘들다"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의 의미를 이 땅에서 실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언젠가 하느님을 알현하게 될 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의 자비를 입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기 위해서도 인간적으로 힘들겠지만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시니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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