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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루가21,5-9)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3-05 조회수52 추천수1 반대(0) 신고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루가21,5-9) <공동번역성경>

5 사람들이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6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7 그들이 '선생님,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즈음해서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8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앞으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 혹은 '때가 왔다!' 하고 떠들더라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들을 따라 가지 말라. 9 또 전쟁과 반란의 소문을 듣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 일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끝날이 곧 오는 것은 아니다.'

5절 ‘어떤 사람들이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본문은, 사람들(유대인)이.. 예수님 앞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위용과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이런 자랑이 나오게 된 배경은.. 아마 이렇다.

공생애 마지막 즈음에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더욱 강도 높게 꾸짖으셨다. “화(禍)있을지어다 너희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엄하게 나무라셨다.

그러자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서, ‘우리를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그래도 우리가 헌금을 내서, 지은 이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보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잘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우리는, 하느님께 대하여, 이렇게 헌물(獻物)을 내서 성전을 지을 만큼, 신앙적 진심과 정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라며 자기들을 두둔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전을 잘 짓고 있는데, 우리를 꾸중만 하시는 것이.. 옳으십니까?’ 라는 뜻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이랬다. 6절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너희들이 자랑하는 성전 그것은 아무 소용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성전을 자랑하는 그들에게.. 찬물을 확 끼얹으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백성이고, 성전을 세우고, 힘을 다하여 번제와 절기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자신들이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사건건, 그들의 평소 생각을, 즉, 우리가 잘 믿고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실제로 주후70년에, 예루살렘 성(城)과 성전(聖殿)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완전히 무너지고, 훼파(毁破)되고 만다.

이것은 처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예레미야 시대에 있었던 일이, 똑같이 반복된 것이다.

(예레7,2-4) 2 '너는 야훼의 성전 대문에 가 서서, '야훼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 오는 유다 사람은 모두 야훼의 말씀을 들어라' 하고 이렇게 큰 소리로 일러 주어라. 3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너희는 생활태도를 고쳐라. 그래야 나는 너희를 여기에서 살게 하리라. 4 이것은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한다마는 그런 빈말을 믿어 안심하지 말라

하느님은, 예레미야 예언자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 문 앞에 서서, 그 성전에 예배드리러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한다마는 그런 빈말을 믿지 말라’

‘거짓말’이라는 뜻은, 그곳이.. ‘야훼의 성전이 아니다’는 뜻이다.

본문 6절에서, 예수님도, 예레미야와 동일한 내용으로, 저주를 퍼부으신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신앙심의 힘을 다하여 성전을 지었고, 또한 성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며, 하느님은 우리 편을 들어주실 것이며, 우리를 위하여 축복할 것입니다.’ 라는 너희 유대인들의 말은.. 예수님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의 종교적 진심과 정성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아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성전이 무너지리라’는 말씀의 내용은 ‘너희 신앙은 거짓이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자, 유대인들의 신앙의 근본을 흔드는 발언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멋있게 지은 성전에서, 예배를 잘 드리고 있습니다!’ 하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아냐, 너희들의 신앙은 전부 허구요, 가짜야!’ 하고 찬물을 끼얹고 계시는 것이다.

즉, 너희가 힘을 다해 이 성전을 짓고 이 성전에 와서 제사(예배)를 지내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과연 무엇인가?

(예레7,5-7) 5 너희의 생활태도를 깨끗이 고쳐라. 너희 사이에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여라. 6 유랑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말라. 이곳에서 죄없는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리지 말라. 다른 신을 따라 가 재앙을 불러 들이지 말라. 7 그래야 한 옛날에 너희 조상에게 길이 살라고 준 이 땅에서 너희를 살게 하리라.

성전 건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는 것이며, 성전 제사보다 더 우선할 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말며 죄 없는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리지 마라. 는 것이다. 이것들은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성전 신앙이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그 진정성이 증명된다는 말씀이다.

그냥 ‘성전만 크게 짓고, 예배만 잘 드리라’고 하셨으면 어쩌면 하기 쉬운데 ‘정의를 행하고, 사회적 약자를 억누르지 말고 돌아보라’ 이건 쉽지 않다.

너희는 종교심, 종교적 진심과 정성을 가지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하신다.

성전에 나와서, 예배는 잘 드리는데, 이웃을 돌아보지 않거나, 오히려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그런 신앙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제사 드리는 그곳은 본질상 ‘하느님의 성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거기 안 계시므로~

유대인은 하느님을 ‘유대인만의 하느님’으로 착각했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온 세상의 하느님’으로 증거 하신다.

6절에 ‘성전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리라.'

이 말씀의 의미를 확장해서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는 ‘하느님은, 너희를 편들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특정 민족의 하느님이 아니시다.’ 이런 뜻도 된다. 하느님은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 되신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유대 선민의 하느님’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즉 하느님이 유대 선민만 위하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은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과거에 예레미야 시대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느님의 성전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 유대 역사를 보면, 홍해가 갈라지고, 예리고 성이 무너지고, 이런 과거 역사를 보면, ‘예루살렘 성전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앙적 확신이 있을 법도 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예레미야 시대와 예수님 시대의 역사가 그대로 재현되고,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는, 자기네가 하느님의 백성이니까, 메시아가 오시면, 로마를 치고, 이스라엘에게 회복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성전이 무너지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뜻밖에, 로마의 멸망을 위해 오시지 않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위해 오셨다. 는 뜻도 된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대목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공의(公義)’, 또는 예수님이 말씀하는 ‘공의(公義)’란 나의 옮음을 위하여, 타인을 심판하는 그런 공의가 아니다.

세상의 정의를 보시라.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평화)는 내 정의를 따라오지 않는 자나 반대하는 자를 처단하고, 우리의 평화를 반대하는 자를 제거해서 만드는 정의요, 평화이다.(지금의 대한민국이 꼭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오심은,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 아래 모두를 묶는 것으로, 공의와 평화를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메시아가 이루시는 공의는,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자비(慈悲)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꼭 누구를 심판(審判)해야 한다면, 자기 자신부터 심판하고, 자기 백성부터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느님을 모르는 다른 이방(異邦)을 심판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보상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에 공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 자신부터 십자가에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부터 성전 무너짐으로 심판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성전이 무너지리라’는 말씀 속에 담긴, 포괄적 의미라고 본다.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찾아오셨는데, 거기에 최대의 걸림돌이 이방인이 아니라 자기 백성, 유대인이었다.

성전을 짓고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이 오히려 하느님에 대하여 '더 모르더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정의, 저들의 (잘못된) 신앙은, 자기 편을 들어주고, 자기의 필요를 채워주고, 자기의 정당성을 증명해 주는 하느님이 그들이 믿는 하느님이었다.

그러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로마가 무너지기 전에, 예루살렘이 먼저 망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 이전에 내가 먼저 온 인류의 죗값을 위해 죽겠다고 하시면서 하느님의 공의, 공평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고, 나는 한 부족의 신이 아니다. 나는 전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이시며,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참 신앙임을 그 인격적 관계는 정의와 약자와 이웃을 돕는 것을 통해 증명된다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제한하고 있고, 너희가 나를 너희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또는 보복수단, 보상수단으로 나를 제한하고 있는데.. 그건 ‘하느님’에 대해서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 시대나, 예레미야 시대가, 반복되는 공통점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예레7,12-14) 12 내가 너희의 살 곳으로 예전에 지명했던 실로에 가 보아라. 내 백성 이스라엘이 못되게 굴다가 나에게 어떤 벌을 받았는지 가 보아라. 13 그런데 너희도 이제 꼭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내 말이니 잘 들어라. 내가 아무리 타일러도 너희는 듣지 않았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14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을 믿고 안심하지만, 나는 실로를 해치웠듯이 이 곳을 해치우고 말리라. 자손 대대로 살라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을 해치울 것이다.

하느님께서 ‘실로에 행한 일’이란, 실로에서 사사로 다스리던 엘리 제사장 때,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전쟁에서 있었던 일이다.

첫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퇴(敗頹)하자 이스라엘은 당황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백성이고, 저들은 우상을 섬기는데 왜 우리가 패한다는 말인가!’

그러자 자성의 소리가 나오면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아서 패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우리 진중(陣中)에 모시자.’

그래서 실로에 있던 성막 안에 모셔놓은 야훼(언약)궤를 가지고 온다. 그 언약궤가 들어오던 날, 이스라엘 전 진이 환호하며, 사기가 충천해지고, 의기양양해진다.

‘이제 하느님이 우리 진 중에 오셨다. 이제는 우리가 이길 것이다.’ 그 환호와 그 사기가 얼마나 충천했던지 땅이 진동할 정도였다.

그 다음날 다시 크게 접전이 이루어졌는데, 이스라엘은 패하고, 그 전날 사상자의 10배쯤 되는,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온다.

야훼 궤는 빼앗기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놀라서 고꾸라져서, 목이 부러져서 즉사한다.

하느님은 신앙이라는 이름과 제사(예배)라는 행위로써, 조종되지 않으신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 내 이익을 위해서, 내 원수 갚음을 위해서, 내 종교성 만족을 위해서 외형적인 종교생활을 열심히 해 봐야 하느님은 결코 휘둘리지 않으신다.

이 사실의 엄중한 경고요, 증언으로, 역사로, 사무엘상권 4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예레미야가 7장12절 이하에서, 인용하고 있다. (본문에 예수님도 마찬가지!)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올바로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신자를 편들기 위하여 계시지 않고, 하느님은 공의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신자(信者)들만을 위하는 하느님이 아니시고, 하느님은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신자들의 형식적 예배에 휘둘리지 않으시며 하느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고,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신자들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복 주신다. 하느님은 신자가 자기를 위하여, 이방인을 제물로 삼는 것을 편들어 주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심판이 필요할 때, 공평하게 하시며, 먼저 자신(의 백성)부터 심판하신다. 하느님은 성전을 헌물을 내어서, 아름답게 꾸미는 것도 원하시지만, 하느님은 그것보다, 이웃을 사랑하고, 불쌍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더 원하신다.

그래서 내가 세례를 받았고, 신앙을 가지고 하느님을 믿고 있고, 그러니 하느님은 당연히 내 편이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저 하느님을 모르고, 하느님을 반대하고,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조롱하는 저들을 쳐 주십시오!’에 대하여 하느님은 누구부터 치시는가 하면, ‘네가 잘못했다. 네 잘못부터 고쳐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을 먼저 신자부터 치신다.

‘그럼, 내가 믿는 것이 무슨 유익(有益)이 있는가?

하느님은 정의롭고, 공평하시고.. 불신자랑 똑같이 대우하신다면.. 아무 유익이 없네!’ 그렇지 않다. 불신자는 모르고 죄를 짓고, 우리 신자는 알고도 죄를 짓는다.

불신자는 하느님을 모르기에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짓게 된다. 그러나 신자는 이렇게 하느님을 올바로 알고서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자기가 죄를 가급적 안 지으면 된다. 혹시 죄를 짓더라도, 속히 회개하고 돌이킨다. - 이것이 신자의 유익이다.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무서움은 이것이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멸망되기 전에, 예수께서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다. 이 순서를 주의 깊게 보시라.

로마가 망하기 전에,-선민 이스라엘이 먼저 망하고,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죽으셨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에 역차별 당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공의, 공평하시고, 다만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똑같이 범죄(犯罪)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과 성전제사는 아무 효험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이미 죽으셨고, 로마가 망하기 전에, 신자들이 먼저 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신자들이 역차별 당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공의, 공평하시고, 다만 신자들이 이방인과 똑같이 범죄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당황하게 된다. (법궤를 메고 나갔다가,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처럼..) ‘왜 하느님은, 내 편이 되어주지 않으실까?’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신앙경력을 자랑하느냐?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

그 신앙경력이란 것은, 내가 진정 하느님을 ‘알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공평과 정의를 행할 때에만 효력이 있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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