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갈 수 없다.” (14,6)
살아오면서 마음이 산란한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스승이신 주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13,33)라는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스승이신 주님께서 자기들의 곁을 떠나신 다음에 남아 있을 자신들의 처지와 상황이 불안하고 걱정스러워 마음이 산란해졌습니다. 모든 희망을 다 걸고 따르며 살았던 그들에겐 스승의 떠남(=죽음)은 엄청난 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14,1) 라는 오늘 복음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주님을 다시 볼 수 없고, 자신들을 떠나신다는 예고는 분명 제자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고, 이로 인해 산란(=때론 마음이나 정신이 어수선하고 뒤숭숭하다.)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 말씀의 방점은 제자들의 산란해진 마음을 질책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산란한 마음을 통해서 제자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에 걱정하고 있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를 주는 듯싶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것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14,2~4) 하고 재차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떠나야 하는 까닭이란 바로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양 우리 안에 들어온 양들)이 아버지의 집에 머물 곳을 마련하기 위함이고, 이를 통해 영원히 아버지 집에서 당신과 함께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지금 겪어야 할 이별의 슬픔을 잘 견디어 내라는 당부와 같습니다. 헤어짐은 잠시이지만 다시 만나 아버지 집에서 함께할 시간은 영원할 것이기에 다시 만날 날을 희망하며 믿음으로 꿋꿋이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다소 생뚱맞게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5)하고 길이신 주님께 길을 묻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산란한 마음의 움직임을 통해서 제자들은 진정 누구를 믿어야 하고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깨닫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중의 어떤 누구도 홀로 길 없는 길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작고한 최인호의 소설 중에 「길 없는 길」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4권으로 된 장편소설인데 그 제목부터 무겁고 심오한 소설입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대학교수가 선승 ‘경허’의 발자취를 뒤쫓는 내용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뒤 경허는 홀연히 환속하여 ‘박란주’라는 이름으로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사라집니다. 그는 ‘길 없는 길’을 혼자 걸었으며 결국 “마음만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빛과 경계 다 공한데 또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요.” 이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합니다.
길 없는 길을 먼저 걸으시고 새로운 길을 만드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갈 수 없다.” (14,6)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은 바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 길을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요16,28)하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까닭이란 사람들을 구원해서 구원된 사람들을 아버지께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의 길은 바로 당신 인격과 당신의 파스카 여정을 통해서 도달하기에 “그 길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갈 수 없다.” (14,6) 하고 명확히 밝히십니다.
주님이 아니시고는,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도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처절한 실존의 한계는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부하신 것처럼 그분의 말씀을 알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 역시 하느님 안에 살아갈 때만이, 예수님이 우리가 의지하며 길을 잃지 않고 걸어갈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주님의 사랑! 이것이 우리가 지금 산란해진 마음을 되잡고 주님의 떠나신 이후에도 꿋꿋하게 걸어갈 힘입니다. 은혜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곧 갈라진 마음 없이 내 사랑을 믿고 의지하라!! 사랑만이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은 길입니다. 예수님이 길이고 길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살아갈 때 이미 우리는 그 길 위에 있는 것이며, 그 길인 예수님과 함께 마침내 그 길의 끝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 도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에, 이 사랑이 바로 길인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께 이르는 길 자체입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길은 길 없는 길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습니다.” (14,6) 곧 예수님의 사랑이 없이는 사랑이요 생명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눈을 뜬 사람과 사랑으로 눈을 뜬 사람에게는 그 길과 아버지의 집이 분명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길을 가면서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살 때 이미 우리는 길이신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의 집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화, 자유와 진리를 충만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마음의 산란함이 사라지고 오직 주님만이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며 길 없는 길이 아닌 길을 통해서 힘차게 걸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예수의 길은 좁은 길이며 험한 길(마7,13-14)이기에 모든 이가 길의 끝까지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려면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을 만날 수 있기에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도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길 없는 길을 걸으면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되시고, 그 길을 걸으면서 살아야 할 진리를 사셨기에 마침내 아버지의 집에 먼저 이르러서 우리가 아버지 집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실 것이기에 앞만 보고 힘차게 달려갑시다. 이토록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집을 그리워하면서,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 겪을 모든 어려움을 사랑의 산제물로 봉헌하면서 우리 모두 다 함께 아버지의 집에 도달합시다. 저는 혼자 가기 싫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가자고요!!! 그러기에 제가 좋아하는 정 호승님의 「봄길」을 보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 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