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길 가면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새삼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오래도록 세상엔 신분제도가 이어져 온 것은 사실입니다. 신분제도를 떠나서, 인간의 크고 작음에 대한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제자들의 논쟁에서 크고 작음은 바로 누가 더 높으며 낮은가, 아니면 누가 더 예수님의 신임을 많이 받느냐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도 무척 궁금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누굴 가장 부자라 하느냐 자기 몫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누굴 가장 강자라 하느냐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이기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누굴 가장 현명한 자라 하느냐 모든 것에서 배우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자이기보다는 더 많이 가진 자 되길 바라고, 강자이기보다는 억누르는 자가 되길 바라며, 현자이기보다는 어리석음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길 더 좋아하는 어리석음 범하며 살아간다. 큰 사람이라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며, 큰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큰 사람이라면 타인의 잘못에는 관대하며, 자신에게는 채찍을 가하는 사람이 아닐까?』 한 번쯤 마음에 새길 말씀이라고 느낍니다.
덧붙여서 여호수아 17,17에 보면, 요셉의 자손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항변합니다. “주님께서 자금까지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셔서 우리가 이토록 큰 무리가 되었는데, 어찌하여 제비를 딱 한 번 뽑아서 그 한몫만 우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십니까?” 요셉 지파는 막상 제비를 뽑고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자기 지파의 크기에 비해 배정받은 땅이 생각보다 훨씬 적다고 불평을 드러낸 것입니다. 사실 땅 한 평도 받지 못한 레위 지파가 들으면 아마도 배가 불러도 한참 불렀다고 들을 소리 아닙니까? 이를 다시 표현하자면, 나는 큰데, 왜 이것밖에 주지 않느냐? 내가 얼마나 열심히 헌신했는데, 왜 이것밖에 주지 않느냐? 나는 우리 가운데 큰 사람(고참이고 연장자)인데 왜 작은 사람 취급하느냐? 나를 어떻게 이런 식으로 대접할 수 있느냐? 이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이 시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우리 내면에서 익숙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아닐까요? 불평과 불만, 부족감에 시달리는 것은 스스로 크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누가 진짜 큰 사람일까요?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봅니다.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알며, 나의 공로보다는 예수님의 은총뿐이라고 고백하는 삶이라고 복음이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 먼저 이런 논쟁이 어떤 배경에서 파생했는지 전후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로 시작합니다. 수난 예고를 듣고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9,32)하고 제자들의 심리상태를 자세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 달라’, 고 하신 예수님의 부탁을 듣고서도 잠에 곯아떨어진 맹목盲目의 상태, 즉 의식이 깨어 있지 않고 잠든 상태와 같았습니다. 하느님의 일 보다는 자신들의 미래와 추종에 따르는 자기 몫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도, 제자들은 이에 아랑곳없이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참으로 어이없게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라는 현실적인 관심사를 갖고 논쟁한 것입니다. 철딱서니하고는. 쯧쯧! 그런 제자들의 철없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느낌이나 마음 상태는 어떠하였을까요? 참으로 어이없으셨겠지만 그래도 이런 제자들을 알고 부르셨기에 그들을 탓하기보다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9,35)하고 가르침의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첫째가 되지 말라’고 권유하기보다는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는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처방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꼴찌는 맨 마지막 있는 사람으로 모든 사람에게 앞자리를 차지하도록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이며 마음 씀씀이를 가진 사람입니다. 맨 뒷자리가 바로 예수님처럼 첫째가 되려는 사람이 머물러야 할 꽃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남을 지배하려 하기보다는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그런 섬기는 삶을 살려면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려는 사람만이 남의 종이 될 수 있고, 종처럼 남을 드높이고 남을 앞세울지 압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무릇 ‘예수의 小婢女'라고 자신을 내세우기도 하고, ‘종중의 종’이라고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종들에게서는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부류인 어린아이들을 기꺼이 환대할 줄 압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9,37) 이런 사람이 바로 첫째가 되는 길이고 예수님께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사람의 존재 태도입니다.
“주님, 철없는 저희를 탓하지 마시고, 아버지 앞에 어린아이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각자의 자녀성을 되찾게 하여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