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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5-30 조회수49 추천수3 반대(0) 신고

 

“그들은 예리코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마르 10,46-47).”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49-52).”

 

 

 

1)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바르티매오의 간청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신 이야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바르티매오가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부르신

 

‘부르심’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어떤 내적인 부르심’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고, 그 소문만으로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가 간청한 ‘자비’는 ‘다시 보는 것’인데,

 

단순히 시력회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 삶’을 뜻합니다.

 

바르티매오가 원하는 ‘새 삶’은, 자기가 메시아로 믿고 있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겉옷을 벗어 던지고” 라는 말은, 그가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음을 나타내고,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도 나타냅니다.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라는 말은,

 

그의 소망이 대단히 간절했음을 나타냅니다.

 

앞을 못 보고, 부축하거나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을 향해서 곧바로 갈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간절한 심정과 ‘능동적인 응답’을 잘 나타냅니다.>

 

 

 

2) 바르티매오의 경우와는 정반대가 되는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그들이 온 섬을 가로질러 파포스에 다다랐을 때에 마술사

 

한 사람을 만났는데, 유다인으로서 바르예수라고 하는

 

거짓 예언자였다. 그는 슬기로운 사람인 세르기우스 바오로

 

총독의 수행원 가운데 하나였다. 총독은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말로

 

마술사를 뜻하는 그 엘리마스는 총독이 믿지 못하게 막으려고

 

그들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때에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가득 차 그를 유심히 보며 말하였다. ‘온갖 사기와

 

온갖 기만으로 충만한 자, 악마의 자식, 모든 정의의 원수!

 

당신은 언제까지 주님의 바른길을 왜곡시킬 셈이오? 이제

 

보시오, 주님의 손이 당신 위에 놓여 있소. 당신은 눈이 멀어

 

한동안 해를 보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즉시 짙은 어둠이

 

그를 덮쳐, 그는 사방을 더듬으며 자기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다. 그때에 그 광경을 본 총독은 주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아 믿게 되었다(사도 13,6-12).”

 

여기서 ‘성령으로 가득 차’ 라는 말은, 거짓 예언자의 눈을

 

멀게 한 일은 바오로 사도가 개인적으로 한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실제로는 거짓 예언자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거짓 예언자의 눈이 멀었다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일인데, 자기 자신도 구원의 진리를

 

보기를 거부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도

 

방해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또 ‘한동안’이라는 말은, 그의 눈을 멀게 한 일은

 

시력을 완전히 빼앗은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또 그 일은 ‘처벌’이 아니라, 그를 회개시키기 위한

 

‘사랑의 회초리’ 같은 것이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거짓 예언자가 회개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회개했다면, 박해자 사울이 앞을 못보고 있다가 회개한 후에

 

다시 보게 된 것처럼(사도 9,18) 다시 보게 되었을 텐데,

 

끝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했다면 그냥 그렇게 끝났을 것입니다.

 

 

 

3) 요한복음 9장에, ‘보는 일’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여기서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왔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구원받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는데,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심판자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과 심판은 ‘내가’ 선택하는 일이 됩니다.

 

<장애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볼 수 있는데도, 보아야 할 것을 안 보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보라고 촉구하십니다.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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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8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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