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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0주일 나해]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6-09 조회수73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10주일 나해] 마르 3,20-35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엑소시즘”(Exorc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말의 뜻을 ‘퇴마’, 즉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라고 알고 있지요. 이 말의 어원이 되는 그리스어 동사 ‘엑소르키스모스’의 뜻이 흥미로운데, 그 뜻을 분석하면 ‘밖으로 나가겠다는 맹세를 받아내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리스 등지에서 어떤 사람에게 씐 귀신을 몰아낼 때 ‘다시는 이 사람에게 안들어오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런 전통이 엑소시즘이라는 단어 안에 반영된 듯 합니다. 이렇듯 엑소시즘의 핵심은 내 안에 스며든 마귀를 쫓아내는 일인데, 우리는 살면서 마귀가 아닌 다른 것을 몰아내려고 하기에 문제가 생깁니다. 마음에서 배려심을 내보내서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타인에 대한 존중을 내보내서 권위적인 사람이 되며, 순수한 열정을 내보내서 위선적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용서와 이해심을 내보내서 자기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지요. 그렇기에 각자의 마음에서 무엇을 내보내고 무엇을 잘 간직해야 할지를 올바르게 식별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러 나섭니다. 여기서 ‘미쳤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엑시스테미’가 앞서 말씀드린 ‘엑소시즘’과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사실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즉 예수님의 친척들은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판단하는 ‘올바른 정신이 그분에게서 나갔다’고, 그래서 미쳐버렸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 예수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종교 지도자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언행을 계속할 것이고, 그에 대한 책임과 벌이 자신들에게까지 돌아올까봐 걱정이 되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붙들어 그러지 못하게 막으려고 그분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가로막으려 드는 것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근거 또한 ‘엑소시즘’과 연관되지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며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신 모든 사건은 그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라는 사람이 ‘메시아’라는걸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요. 그래서 그분이 그런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는 그 능력이 어디서 온 것인지 그 ‘기원’에 관해 악의적인 헛소문을 퍼뜨립니다. 즉 예수라는 자는 마귀들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그런 놀라운 일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니 자기들이 기다려온 ‘그리스도’와는 아무 상관 없다고, 오히려 그런 사술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그를 공동체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사람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쫓아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미움으로 왜곡해서 보는 그들의 비뚤어진 마음입니다. 자기들의 뜻과 고집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의 뜻마저 거스르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보면 하느님의 사랑을 미움으로 보고 밀어냅니다. 진리의 빛을 어둠으로 보고 피해갑니다. 그러는 사이 그들 스스로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마귀’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경고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형제의 잘못을 일흔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주님이시지만, 오른뺨을 때린 원수에게 왼뺨까지 돌려 대라고 하시는 그분이시지만, 주님의 자비에 안주하려고 들어서는 안됩니다. 자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서 나태하고 안일한 자세로 마냥 주님께만 의지하려고 들어서는 잘못을 용서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경우’입니다.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에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오늘의 제1독서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잘못을 저지른 뒤, 자기들을 찾으시는 하느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시기 위해,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그들을 찾으셨는데, 그들 스스로가 하느님 앞에 떳떳하지 못했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심판으로 왜곡해서 보고서는, 두려움에 빠져 그분을 피해 어둠 속에 숨은 겁니다. 회개할 기회, 용서받을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 버리고는 죄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옭아매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제 뜻과 고집을 따르며 주님을 오해하는 ‘세상의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따르며 그분을 온전히 바라보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아주 섬세한 공간적 대조를 통해 ‘하느님의 사람’과 ‘세상의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 뜻과 고집을 따르는 ‘세상의 사람’들, 즉 예수님의 친척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머무르시는 집의 ‘밖에’ 서 있습니다. 반면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따르는 ‘하느님의 사람’들, 즉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군중들은 그분 ‘주위에’ 둘러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바로 그들이 당신의 ‘가족’이라고 분명히 선포하시지요. 세상의 가치와 기준, 내 뜻과 고집은 내 마음 밖으로 몰아내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여 그분을 내 마음 안에 받아들여야만, 그분께서 베푸시는 충만한 은총과 사랑을 제대로 알아보고 맘껏 누리는 그분의 참된 자녀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면서 꾸준히 행해야 할 진정한 ‘엑소시즘’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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