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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마태오 6, 24 - 34
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6-21 조회수39 추천수2 반대(1) 신고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6, 32~34)


제가 저 자신을 바라볼 때 세상에서 참 좋은 몫을 택했다고 봅니다. 사실이지 제게 무슨 심각한 세상적인 걱정이 있겠습니까? 흔한 말로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에 걱정이 없으며, 명퇴나 정년퇴임이 없는 종신 직장에다 보험도 든든하고 노후 걱정도 없으니, 자식 걱정이나 부모님들도 이미 돌아가셨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제 팔자가 정말이지 상팔자인데 왜 세상 사람들은 저와 같은 신분(=수도자)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아마도 제가 모르는 그 무슨 비밀을 세상 사람들은 알고 계시듯 싶습니다. 도대체 아무도 가르쳐 주시지 않는군요! 

어느 종교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상관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각기 다른 걱정과 근심을 지닌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인생살이란 과거에 대한 후회와,  현재에 대한 근심과 걱정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살아간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후회와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불안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려드는 게 인생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한 압박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가정이 있고 가족이 있다면 저인들 별도리가 있을 수 없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아니 훨씬 더 무거운 근심과 걱정에 휩싸여 살아가리라 봅니다.

성서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든 아니면 지나쳐 버리든 각자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자신의 몫이라고 봅니다. 암튼 걱정에 관한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한 문장으로,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6,27)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걱정이란 말은 본디 근심한다, 염려한다, 관심을 가진다고 하는 뜻입니다. 걱정은 근심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에 관해서 수많은 한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것은 죽음이잖아요. 뻔히 죽을 것 알면서 그 죽음에서 어떤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는 한계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적 한계 현실입니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근심과 불안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를 수용하고, 수용하지 않으냐에 따라 인생관과 인생에 대처하는 삶의 태도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걱정하며 살아가는 걸까요? 주님은 이렇게 처방전을 줍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6,30-32)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걱정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적기 때문에 생긴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믿음이 약하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국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이 하느님 언약의 말씀을 믿지 못할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며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 근심 걱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약속을 붙들고 싸우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 만큼, 의탁하는 만큼 자유의 폭은 정비례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때론 예기치 않은 시련이나 환난 그리고 고통을 당하더라도 담대한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의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신실하시며 언제나 자기의 영광을 위해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 때문에 말씀을 믿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또한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신앙은 약한 믿음입니다. 인간의 걱정은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의 모든 염려에 대하여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을 의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걱정에 대한 성서적인 해답은 그 걱정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베1서 5,7) 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시며 걱정을 알아서 해결해 주신다고 했으니, 결론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6,33)라는 말씀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이 가르침은 매일 그리고 생애를 거쳐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원칙이며 명제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명심하고 최우선적인 삶의 가치로 살아갈 때,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6,33) 그러니까 하느님의 모든 축복의 비밀은 이 짧은 말씀에 온전히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며 목표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대의 일이 그대의 목적과 늘 일치하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흔히 사용하는 목적이란 영어 purpose는 의도하다, 는 propose(=pro+pose; 앞에 두는 것)에서 파생한 단어라고 합니다. 우리의 매일의 의도하는 일이 항상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과 일치해서 살아간다면 매일의 삶이 분명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목적을 위해 부르심 받았기에, 이 목적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며 축복받은 삶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라고 하신 당신 말씀처럼 당신의 섭리에 맡기고, 다만 오늘 이 순간 제 삶의 자리에서 살아야 할 이유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자각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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