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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열 신부님_탈출기와 열왕기 묵상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6-28 조회수44 추천수2 반대(0) 신고

지난 시간에 아가서에 대해 잠깐 묵상했습니다.


오늘은 아가서에 이어서 출애굽에 대한 단상을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 잊어버려서는 안 될 사건, 흔들릴 때마다 다시 기억해야 할 사건,

또 유일신 사상이 무너져 내릴 때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건은 딱 한 가지입니다.

‘출애굽에 대한 체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출애굽, 엑서도스(Exodus)죠.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의 그 체험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고 있었죠.

노예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자유도 없었죠.

그리고 또 하느님을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그렇죠.

정말로 노예로서 가혹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었던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기 위해서 누구를 선택하십니까?

지도자 모세를 내세웁니다.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에겐 사실 아무런 무기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힘과 무기가 있었다면 그렇게 노예 생활을 했겠습니까?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모세는 빈손으로 왕궁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지시대로 이집트 왕에게 민족의 해방을 요구합니다.

이때 하느님은 모세를 돕죠.

수많은 기적을 이집트 왕에게 보이면서 드디어 탈출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집트를 나오자마자 첫 번째 난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뭐겠습니까?

일단 국외 탈출을 허락한 왕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전차 600대를 이끌고 추격합니다.

앞에는 넘쳐흐르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는 전차 부대가 공격하려고 다가오고 있었죠.

탈출했던 인원이 200만 명이라고 하지만, 사실 노인과 어린이를 포함한 집단이었습니다.

즉 말만 200만 명이지, 공격해 오는 이집트 전차 군단과 맞서서 싸울 힘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죽은 목숨이었죠.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었고, 또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홍해가 가로막고 있어서 나아갈 수 없는, 진퇴양난에 처합니다.

공포에 떨게 된 백성은 하느님께 울부짖고 또한 모세에게 덤벼듭니다.

‘이집트 땅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들을 끌어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투덜거림에 전혀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말하죠.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밤 너희를 위하여 행하실 구원을 눈으로 봐라.’

모세는 확신했죠, 하느님의 구원을.

그리고 너희들을 이집트 손에서 건져내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르게 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있다고 해도 공격해 오는 이집트군을 뒤에 두고

대체 모세는 어떻게 이 난관을 통과하려고 그렇게 자신만만하였을까?

어떻게 해서 이 위기를 극복하는지 아시지요?

모세는 홍해 바닷가에 서서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밉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밤새도록 태풍을 일으켜서 바다에 길을 내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 바닷길을 따라서 바다를 다 건너자, 이집트 전차 군단도 그 바닷길을 따라서 병거를 달리게 합니다.

그렇지만 모세가 다시 손을 바다 위로 내미니, 길은 다시 바다로 변하고 이집트군은 바닷속에 수몰이 됩니다.

 

이처럼 확실한 하느님의 구원하심을 체험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수없이 하느님을 의심합니다.

‘먹을 물이 없다, 왜 우리를 목말라 죽게 하느냐? 또 먹을 것이 없다,’, ‘고기 먹고 싶다.’

이렇게 원망하죠.

참 기가 막히게도 이렇게 불평할 때마다 하느님은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배불리 먹게 하였고요.

메추리를 주셔서 고기를 또 먹게 합니다.

 

출애굽기에 이런 내용을 읽으면 언뜻 생각나는 것이 하느님이 아무리 더 큰 기적을 보여주셔도

사람들은 너무도 빨리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도와주셔도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조금만 곤란한 일이 생겨도 곧 불평을 늘어놓지요.

바다를 갈라 길을 열어주신 것을 생각만 하여도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서 그 기적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터인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저는 이 출애굽을 읽고 있노라면 사실 조마조마해집니다.

이런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은 꾸준하게 몇 번이고 구원의 손길을 뻗으시고,

이다지도 불신앙의 인간들에게 이다지도 은혜를 베풀어 주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만큼 망은을 체험하신 분이 계셨을까?

‘망은(忘恩)’, 말 그대로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매 맞으셨을 때, 모욕당했을 때, 오병이어의 그 수혜자들은 어디에 가 있었던 겁니까?

3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치유하고, 구마 시키고, 기적을 일으켰지만,

그 기적을 봤던 수많은 사람 중 어느 누구 하나 예수님을 옹호하고 변론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사실 3년 동안에 기복적인 마음으로 예수님을 쫓아다녔던 그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더 큰 기적, 더 자극적인 기적, 더 드라마틱한 기적, 더 화끈한 기적을 자꾸만 요구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기적의 은혜를 바로 즉시 잊어버렸던 거죠.

예수님의 그 기적의 의미를 절실히 깨달았다면 돌을 던지는 폭도로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바라빠를 내주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 지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만큼 은혜를 배반당하신 분이 있을까?

 

하물며 다른 사람을 배반하기 쉬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배반당했다고 해서 분노할 자격이 과연 있을까?

그럼 나는 과연 배반하지 않고 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가?

출애굽을 몇 번이고 읽어보노라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어쩌면 그렇게 우리 인간들의 모습일까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 말이 있죠? ‘목젖만 넘기면 뜨거움을 잊어버린다.’

이 말처럼 구원받고 은혜받고 치유받았을 때는 고마워하지만 곧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저는 출애굽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여러 번 던졌습니다.

이런 불신앙의 민족을 왜 구원하셨을까?

이렇게 끝도 없이 하느님을 원망하고 불경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백성을 왜 구원하셨을까?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결론은 ‘하느님은 원래 그런 분이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불신앙의 인간을 위해서 외아들을 주신 겁니다.

그 외아들을 십자가에 매달 만큼 인간은 죄 덩어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그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이죠.

하지만 하느님은 예수님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것으로 전 인류의 죄를 소멸해 주신 거죠.

하느님의 외아들은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관대함은 끝이 없습니다.

얼마나 관대한 하느님이십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온 그 시대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 탄생하기 전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모세의 깊은 신앙을 보시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몇 번이고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신 겁니다.

흔히 구약의 하느님은 분노하시는 하느님, 노하시는 하느님이라고 종종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출애굽기를 읽으면 노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내하시는 하느님이고,

그리고 참으시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이 확 들어옵니다.

 

아무튼 어느 쪽이든 간에 이스라엘은 하느님 구원의 은총과 하느님의 인도로 세워진 나라임은 확실합니다.

그 후 수천 년에 이르는 긴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은 곤란을 당할 때마다 출애굽의 그 체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출애굽의 체험을 후손들에게, 자식들에게 전달합니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주고 분발시켰던 것이죠.

 

하느님을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 하느님에게 인도받고 있고,

또 보호받고 있고, 또 끊임없이 은총 안에서 살 것을 확신합니다.

체험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크건 작건 간에 내 역사 안에 하느님께서 어떤 시간에 나와 함께 하셨다고 하는 것을 느끼는 거죠.

이러한 것을 생각하시면서 출애굽, 요즘은 탈출기라 하죠?

출애굽기를 다시 한번 숙독하시기를 권합니다.
 




아합왕에게 충고하는 이제벨 (제임스 티소트)
 

두 번째의 단상은 열왕기 상과 하에 나오는 어떤 특정 인물에 대한 묵상입니다.

묵상이라기는 좀 그렇고 아무튼 저는 열왕기 상, 하와 역대기를 읽으면서 한 사람이 눈에 계속 밟힙니다.

그건 왕비 이세벨입니다.

 

열왕기와 역대기에는 역대 왕들의 사적과 선지자들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사적을 자기 나라 사람이 기록할 때는 대개 격찬하고 왕의 업적을 높이 칭송합니다.

가능한 결점은 거의 적지 않죠.

그리고 그 결점에 대해서 말하는 것조차 회피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역대기에 왕에 대하여 전혀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

미화시키는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다윗 왕도 그가 범한 죄를 용서 없이 성경에서는 드러내놓고 있지요, 맞죠?

바로 이것은 뭡니까? 중요한 얘기죠.

‘절대 유일신 외에는 무엇이든 위에 두지 말라’는 계율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공이 있는 왕이라도 결코 우상화돼서는 안 된다는 확실한 신앙이 이러한 역사를 낳은 겁니다.

그래서 왕에 대한 미화가 없습니다.

공과 사를 분명히 적어놓습니다.

사랑받았던 어떤 왕이라도 왕으로 있을 때 어떤 범죄를 저질렀거나 아니면 신앙적으로 타락했던 것을

절대로 미화하거나 합리화하지 않습니다.

성서의 역사에는 불신앙의 왕이 어떻게 하느님의 은사에서 떨어져 나갔는지, 그 사실들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숨김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역사적인 역사책인 동시에 신앙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지요.

한마디로 성서 책은 이스라엘을 하느님에게 돌아오게 하는 거룩한 책입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역대 왕 중에서 아합왕이 떠오릅니다.

아합왕에게는 악처라고 그럴까요, 악녀라고 그럴까요?

지독한 아내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이 아내에게 충동이 되어 악한 일을 거듭거듭 범하고 맙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아마도 이스라엘 최대의 악녀일 이세벨에 대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왕이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왕비를 잘못 만나면 이렇게 못된 왕으로 변합니다.

제가 그런 얘기 가끔 하죠.

남자도 여자를 잘 만나야 하고 여자도 남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아주 못된 왕, 또 못된 왕비로 아합과 이세벨은 회자됩니다.

 

이세벨은 역대의 왕비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여인이었습니다.

악녀라는 여인은 어딘가 매력적인 곳이 있을 법도 한데, 이 이세벨에게는 마음 끌리는 곳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이세벨은 이국 왕의 딸로 왕 아합에게 시집 온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바알이라는 우상을 부지런히 섬깁니다.

그녀는 남편 아합에게 유일하신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도록 온갖 강요를 합니다.

확실히 이세벨은 남편보다 억센 여자로 나와 있지요.

그래서 아합은 이세벨에 끌려다니기만 합니다. 꼭두각시 왕이 된다 이 얘기죠.

이세벨은 본래 남편이 섬기고 있던 야훼의 선지자 100명을 박해한 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선지자는 상대가 왕이건 고관이건, 악은 악으로 지적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에 눈엣가시였던 겁니다.

이세벨, 또 우상 숭배하는 아합왕에게 선지자들은 손에 찔린 가시처럼 아픈 존재였던 거죠.

그래서 이세벨은 박해합니다.

 

이세벨에게 박해받은 선지자 중에는 엘리야와 그 제자 엘리사라는 두 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때에도 하느님에게서 떠난 적이 없는 선지자였죠.

그리고 수많은 기적을 행합니다.

엘리야의 기도로 인해서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던 때도 있었고요.

그러다 그가 다시 기도하니 또 큰 비가 내립니다.

또 그의 제자 엘리사도 가난한 과부를 도왔죠.

항아리의 가루와 병의 기름을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았던 기적, 죽은 이를 다시 살렸던 이야기,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 대장을 깨끗이 고친 이야기 등 정말 신기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여러분들도 구약성서를 펼치시고 그 밖의 이야기들을 꼭 한번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합왕 얘기를 조금 더 할까요?

나봇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의 포도원이 아합왕 궁전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아합은 그 포도원에 눈독을 들이고 소유자였던 나봇에게 말합니다.

‘네 포도원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줄 터이니 네 것을 내게 주어라, 원하면 그 값을 돈으로 내가 줘도 좋다.’

그러나 나봇은 조상의 유업이기 때문에 왕에게 줄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이스라엘에 내려오는 관습법에는 토지는 대대로 팔아선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상의 유업을 보존하라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토지를 부득이 팔게 될 때는 가까운 친척에게 매매하게 되어 있고요.

상대가 왕이라도 법을 꺾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팔라고 하는 왕의 요구는 거절됩니다.

또 그 거절은 나봇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죠.

그렇지만 아합왕의 소원은 율법을 꺾으려는 아주 못되고 횡포한 요구이기도 했습니다.

율법을 부숴서라도 자기가 취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 땅을 갖고 싶었던 겁니다.

아합왕은 거절당하자, 화도 나고 낙담도 해서 음식도 넘기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버립니다.

아마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아합에게는 아직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양심이 좀 남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본 왕비 이세벨은 ‘왕이여, 일어나서 식사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나봇의 포도원을 왕에게 드리겠나이다.’ 이렇게 당돌하게 말합니다.

사실 이세벨에게 율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권력이 있을 뿐이었죠.

나봇이 하느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 증거를 대고 돌로 쳐 죽이게 합니다.

이세벨은 하느님을 배반한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실한 신앙의 사람 나봇을 억울하게 죽입니다.

이세벨은 사리사욕을 위하여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못된 짓을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그러한 인성의 사람이었던 겁니다.

성경에는 이세벨은 미인으로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 야한 화장 밑에는 악독하고 잔인한 성품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때 선지자 엘리야는 이렇게 얘기하죠.

‘왕이요, 야훼 말씀입니다. 나봇을 네가 죽이고 밭을 빼앗았지만, 나봇의 피를 흘린 곳에서 개들이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이렇게 하느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아합은 발끈하죠.

‘네놈이 나의 큰 적이고 오늘 네가 풍기는 냄새를 내가 드디어 맡았다.’

이렇게 증오에 가득 찬 말을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뭐라고 그러죠?

‘야훼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기에 야훼께서 재앙을 너에게 내리고, 너를 쓸어버리고, 너에게 속한 남자는 다 멸할 것이다.

또 네 아내 이세벨의 시체도 개들이 성 곁에서 찢어 먹으리라.’

이렇게 아주 살벌하고 무섭게 말합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기백의 예언에 아합도 깨갱깨갱하면서 꼬리를 내리고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아합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아합은 자기의 모든 비행을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합니다.

이것을 보신 하느님은 재앙을 아들의 시대까지 연기하기로 하시지요.

여기서 또 저는 좀 답답했습니다.

‘참! 벌주시는 것이 또 연기가 되는구나.’

회개하는 자에게 관대한 하느님의 마음이 다시 또 나타납니다.

한 번 따끔하게 벌 주면 그것도 큰 교육이 될 텐데, 하여튼 하느님은 회개만 하면 어떤 죄를 지었다더라도 이렇게 용서하시는구나!

 

아합은 회개했지만, 그의 여자 왕비 이세벨은 날로 더 교만해집니다.

나중에 아합왕이 죽고 아들 요람이 왕위에 올랐지만, 이세벨은 역시 권력을 휘두릅니다.

그 결과 아합의 신화였던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게 되죠.

예후와 요람은 무지하게 죽은 나봇의 포도밭에서 대결합니다.

요람은 예후가 쏜 화살에 심장이 뚫리고 죽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는 포도밭에 던져집니다.

예전에 하느님이 내리신 그 예언이 성취됩니다.

승리를 거둔 예후는 이세벨이 있는 성으로 쳐들어가죠.

음행과 술수에 능한 늙은 이세벨은 창에서 던져지지요.

땅에 떨어지자마자 말이 짓밟아 이세벨을 죽이죠.

그리고 예언대로 시체를 개들이 뜯어 먹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에는 수많은 왕이 등장하지만, 하느님을 배반한 왕은 제아무리 그 영화를 과시하여도 결국은 멸망하고 맙니다.

바로 이 역사책이 증인이 되지요.

이처럼 여러 왕의 생애는 현대에 사는 우리 생애의 방향을 지시하는 교훈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목숨을 걸고 하느님 말씀을 예언한 선지자의 생애는 우리의 자세를 바로잡게 해줍니다.

삐딱하게 기울어지는 우리들의 자세를 바로잡게 해줍니다.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고, 머리를 빳빳하게 쳐들려고 하는 우리의 자세를 머리 숙이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출애굽기 탈출기와 아합왕과 이세벨에 대한 짧은 단상 두 편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호세아와 말라기서를 하면 구약성서 강의는 끝이 나겠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제가 얘기했던 것 잘 명심하시고, 특히 열왕기와 역대기에 나오는 왕들 얘기,

솔로몬의 이야기서부터 한번 쭉 읽어보시고,

특별히 아합왕과 이세벨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이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해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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