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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마태오 8, 18 - 22
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6-30 조회수19 추천수3 반대(0) 신고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8,19)  


세례성사를 받고 6개월쯤 되던 때, 저에게 교리를 가르친 포항 예수성심회 프랑소와 수녀님께서 저에게 “아오스딩 로만칼라 차면 참 멋있겠다.”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축성식(1969. 4월)에 참석하고 다녀오신 ‘광주 화정동’ 소재의 예수고난회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수도자가 어떤 존재이며 수도 생활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나 정보도 없었습니다. 단지 로만칼라를 차면 멋있겠다는 수녀님의 권고와 추천의 소리를 듣고 아무런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이 ‘네, 수녀님 할 수 있다면 로만칼라를 차지요’라고 서슴없이 응답하였습니다. 다음 달 5월, 제 동기들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떠났지만, 저는 광주 화정동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이 첫 방문에서 박도세 신부님과 만남이 인연이 되어 지금껏 이 수도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8,19)라는 고백은 어쩜 이미 제가 제 누이의 무덤가에서 ‘죽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누이에게 위안이 될까?’라고 생각하던 때부터 성소의 씨앗은 이미 제 영혼 속에 뿌려졌다고 봅니다. 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따르다. 곧 추종’에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존재들이며 그 본보기가 바로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수도공동체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 머물면서 직접 몸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면서 자신을 버리고 과거의 시간과 장소로부터 떠나 새로운 삶의 자리로 건너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구체적인 삶입니다. 그 따름의 길은 단거리가 아닌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이며, 곧 생애를 통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아주 멀고 먼 영적 순례와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지금도 줄곧 스승이신 주님을 따르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보면 초기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일어나는 어려움이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에 어떤 조건이나 단서가 없이 무작정 좋아서 따랐다고 봅니다. 사랑의 눈멂처럼 아무 어려움은 보이지 않았고 모든 것이 마냥 좋았습니다. 물론 주님을 따라간 여정의 거리와 시간에 비례해서 성장하는 게 아니더군요. 처음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따름의 속도도 느려지고 그에 따라 마음의 갈등도 일어났으며 내적 고통과 힘듦이 살며시 제 따름의 삶에 밀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무식하지만 용감하게 뒤돌아보지도 않고 따르다가 차츰 저 자신을 알아가면서 샛길로 빠지기도 하고 더디어지기도 하면서 점차 추종의 동기도 정화되고 세련되면서, 지금껏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의향을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실망스런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단지 그 율법 학자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무언가를 말씀하고 있다고 봅니다. 즉 인간의 겉모양을 보시지 않고 속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는 아마도 그 사람의 추종의 동기가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감상적이나 일시적 기분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분명한 추종의 동기는 물론 그 동기를 지속할 수 있는 성숙함과 굳건함이 있어야 따름에 수반되는 내-외적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되돌아보면 따름은 단지 열정만으로 부족하고 내적 의지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감정도 좋지만, 굳은 의지가 수반하지 않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열정은 식기 마련입니다. 추종의 길은 결코 낭만적인 측면만이 있는 게 아니라 추종에 요구되는 내적 자신과의 싸움, 비우고 버리고 낮아지고 죽어야 하는 처절한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베트남에서 생활할 때, 성소 식별에 있어서 차이점은 영어권의 형제들은 일단 성소자들의 영어 이해와 구사 능력여부에 기준점을 두었지만, 저는 그들의 내적 성소 동기에 강조점을 두었기에 참 많은 갈등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8,20)하고 대답하신 예수님은 참으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2고린 8,9) 그래서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고 강조하셨는지 모릅니다. 어쩜 그는 부유한 사람이었지 않을까 싶네요.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나선 삶도 마찬가지로 여우의 굴이나 새의 보금자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추종의 여정에서는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어려움이 생길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그 안에 삶의 행복이 있다고 믿기에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지금은 사제나 수도자들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이 살고 있지 않음을 여러분 알고 계시죠. 때론 부끄러울 때가 있을 만큼 크고 넓은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처럼 단지 외적 크기만을 보시지 말고 추종에 따른 내적 싸움이 더 어렵고 힘든 여정임을 기억하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이미 추종을 시작한 이들이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지금의 추종이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화답송 후렴/시50,2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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