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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4주일 나해]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4-07-07 조회수67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14주일 나해] 마르 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혼자 힘만으로는 어려우니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부족하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은 나 혼자 사는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서로 돕고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건 비단 인간의 일만 그런 게 아니지요.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 우리가 흔히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일으키고자 하시는 기적은 단순히 당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일으키고자 하시는 기적은 당신의 사랑에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여 함께 우리 삶과 세상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일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게 아닙니다.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이 ‘사랑’에서 비롯되기에, 당신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우리와 ‘함께’ 일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향 마을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께서 먼저 손을 내미시는 모습을 보고도 그분께 믿음으로 손을 맞대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이 그런 이유인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 고을 회당에서 하느님 말씀에 대해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놀라움은 인간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경이로운 모습을 마주했을 때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순수한 감정적 반응으로, 그 자체로는 좋다 나쁘다를 가릴 수 없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이 놀라움이 감사와 찬미로 이어져 하느님의 현존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면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만, 시기와 질투로 이어져 상대방보다 높아지려는 교만의 마음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면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부정적 변화를 일으키지요. 오늘 복음 속 나자렛 마을 주민들이 바로 이 후자를 선택합니다. ‘인간’ 예수님의 가정환경과 유년기 모습을 기억하는 그들로서는 잘 나가는 대단한 집안 출신도 아니고, 율법에 대한 배움도 깊지 않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는 지혜를 술술 풀어내시니, 그 모습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저 사람이 저 모든 것을 어디서 얻었을까?’라고 묻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런 마음가짐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그런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를 알아내어 자기도 그것을 얻기만 하면, 고작 ‘목수의 아들’일 뿐인 저 예수보다 내가 더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교만의 마음이 엿보이는 것이지요.

 

물론 주님의 능력과 지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나자렛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진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 직접 물어볼 용기도, 그분께서 시키는대로 따를 의지도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마음은 자연스레 예수님께 대한 미움으로 흘러갑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지혜와 능력을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노력하여 얻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예수님을 폄훼하고 깎아내려 자기들보다 못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겁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모습입니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라는 말을 그리스어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무엇에 걸려 넘어진 것일까요? 자기들이 예수님에 대해 ‘잘 안다’는 착각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놀라운 능력과 지혜를 지녔어도 자신들과 같은 수준일 뿐이라는 ‘오해’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그 오해와 착각이 그들의 눈에 고정관념과 편견이라는 색안경을 씌우고, 그들의 마음에 완고함과 불신이라는 벽을 만들어, 예수님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것이지요. 즉 예수님보다 그분에 대한 자기 생각을 더 믿는 일종의 ‘우상숭배’에 빠진 셈입니다.

 

그런 모습은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고정관념과 편견, 욕심과 고집으로 빚어만든 하느님의 ‘우상’을 하느님이라고 믿게 되면, 그 잘못된 믿음 때문에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내 안에 갇히는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속 우상을 깨부수고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분을 내 사고의 틀 안에 가두거나 내 기호에 억지로 맞추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억지로 밀어넣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내가 아는 하느님’이라는 벽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그분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나자렛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편견이 빚어낸 결과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기적을 못일으키신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랑과 호의로 먼저 내미신 손에 믿음으로 자기들 손을 맞대지 않았기에 기적의 박수 소리가 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주님께서 언제 어느 방향으로 손바닥을 내밀고자 하시는지 그분 뜻을 헤아리지 않은 채, 자기 욕심과 고집이라는 좁은 시야 안에 갇히면 그렇게 됩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제 멋대로 손을 휘저으면서 ‘왜 주님은 내 손뼉을 마주쳐 주시지 않느냐’고 그분을 원망하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참된 기적은 내가 원하는대로 일이 진행되는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내가 제대로 알아보고 그 흐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삶이 구원이라는, 참된 행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마을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사람들의 불신에 실망하거나 분노하신게 아니지요. 그저 놀라셨을 뿐입니다. 나자렛 마을 사람들의 놀라움이 고정관념과 편견이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들 앞에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은 자제하십니다. 그들이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은 당신을 향한 우리 믿음의 뿌리를 깊고 단단하게 하여 그 믿음을 통해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인데, 그들이 믿지 않으니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게 당연합니다. 믿음 없는 기적은 서커스나 마술쇼에 불과할 뿐,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기에, 그저 당장 우리 눈에 화려하고 좋아보이는 헛된 것들을 쫓게 만들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참된 믿음만 있다면 삶의 모든 순간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축복들로 가득한 ‘놀라움의 연속’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 놀라움을 감사와 찬미로 이어갈 수만 있다면 우리 삶에는 기쁘고 행복할 일들이 가득할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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