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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성 보나벤투라 주교 기념(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마태오 10, 34 ? 11, 1
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7-14 조회수56 추천수2 반대(0) 신고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10,34)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까닭이란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갈망에서 그리스도를 추종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온전히 추종하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인 것과의 절단이 요구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10,37.38)라고 말씀하신 그 근저에는 ‘무엇이 더 중요하며, 어떤 일이 먼저 실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생명을 얻고 더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그에 필요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평화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묻는다면 그 응답은 참으로 여러 가지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세상적인 평화, 곧 기복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2,14)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며, 이 평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가져온 부활의 선물입니다. 부활의 선물인 평화를 충만히 누리며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오늘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연유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10,34)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두지 않을 때, 참된 평화를 얻지 못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무척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14,2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이해가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평화는 분명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전적으로 다른 평화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이 주는 평화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현세적 평화는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 수 있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 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주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룬 평화이며, 우리 역시 이 평화를 누리며 살기 위해서 동일한 여정을 지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충만히 누리기 위해서는 이 평화를 저해하는 불화와 불목의 요인을 마치 칼로 절단하듯이 잘라내는 아픔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만일 그 대상이 부모나 가족, 누구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인간적으로 어렵고 힘들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추종하기 위해, 복음의 가치 실현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구원, 곧 제 목숨을 얻기 위해(10,39참조) 기꺼이 그 요인을 잘라내는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야 합니다. 평화란 불화와 불목의 요인을 제거하고 극복하고 난 뒤에 선물처럼 다가옵니다. 가족과의 불화와 갈등을 두려워하거나 갈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무서워해서는 아니 되고, 그 불화와 갈등의 요인을 직시하고 직면해서 싸워야 합니다. 이처럼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불화의 요인을 제거해야 하고 절단해야 합니다. 

칼의 쓰임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처럼, 평화를 위한 칼도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위한 성령의 칼을 주십니다. 결단과 절단의 순간에 우리는 예수께서 주신 칼로 단호하게 절단해야 합니다. 오늘도 끊임없이 결단과 절단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주신 칼을 잘 사용하십시오. 평화를 위해 칼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 절단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공동체 구성원을 함께 상생하고 함께 부활하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2, 14)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평화를 간절히 원하며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저는 지금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봅니다. 이젠 성인이 되신 성 요한 23세 교종께서는 『평화를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평화를 위한 4가지 기둥을 세우는 것입니다. 진리와 정의, 사랑과 자유의 4가지 기둥을 세울 때, 평화란 지붕을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십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네 삶이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넘쳐난다면 마음은 늘 꺼림칙할 것이며, 정의가 아닌 불의하고 부정한 일을 할 땐 마음은 늘 켕기고 불안할 것이고, 자유가 아닌 억압과 강요로 어쩔 수 없어서 일한다면 심기가 불편할 것이며, 사랑이 아닌 미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네 삶이 매일 매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진리와 자유를 실행하며 살아갈 때 참된 평화를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고 누리며 살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것이 곧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할 일이라고 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위해 기꺼이 세상이 주는 평화를 포기해야 합니다. 평화는 이렇게 어려움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충만히 누리는 오늘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주님 평화를 주시옵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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