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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수철 신부님_“어떤 삶을 살 것인가?”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09:06 조회수8 추천수1 반대(0) 신고

 

성체성사적 삶

 

 

“주님, 당신 손을 펼치시어 

 저희를 은혜로 채워주소서.”(시편145,16)

 

오늘 두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던중 퍼뜩 떠오른 강론 주제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성체성사적 삶”이었습니다. 성체성사는 비단 가톨릭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희망이요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세초 유럽의 혼란은 종말처럼 생각되었고 이어 유럽을 암흑의 혼돈에서 구한 것이 가톨릭교회요 성 베네딕도 아빠스를 사부로 모신 성 베네딕도 수도회였습니다. 

 

오늘날은 중세초의 유럽처럼 전세계가 흡사 길과 희망을 잃은듯한 혼란한 시기같습니다. 이제는 성소자의 위기와 더불어 교회지도자 부족의 위기라는 극심한 인재난을 겪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유망한 후배들이 잘 보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사람은 나무와 같아 처음부더 잘 성장되어야 좋은 목재와 같은 인재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흡사 거목들 즐비한 심산유곡이 아니라 잡목우거진 야산같은 세상처럼 보입니다. 

 

‘과연 디지털 문명, 인공지능이 우리의 미래와 희망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감이 듭니다. 다시 한번 가톨릭교회가 온 세계와 온 인류의 길과 희망이 되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여기서 빛처럼 떠오르는 교회요 성체성사적 삶이었습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가톨릭교리서 1324)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온세계, 온인류의 공동자산이 된 성체성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희망과 길을, 중심과 의미를 잃고 혼란을 겪는 작금의 시기에 혜성처럼 떠오르는 가톡릭교회의 하느님 중심의 성체성사적 삶입니다. 옛 어른의 말씀에 대한 답도 성체성사적 삶이 줍니다.

 

“하루를 마치며 되돌아 본다, ‘나는 오늘 나로 산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다산>

바로 참 나로 깨어 살게 하는 것이, 참 나를 비춰주는 거울같은 삶이 하느님 중심의 성체성사적 삶입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논어의 공자>

이 모두를 일거에 충족시켜 주는 하느님 중심의 성체성사적 삶이요, 더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의 자녀답게’의 삶입니다.

 

지난 과학잡지 뉴턴 7월호 표지에 한 말마디가 마음에 꽂혔습니다. 이제부터 매달 나오는 과학잡지를 대강이라도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제는 “곡선의 신비, 우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곡선이 넘쳐난다. 우주와 자연은 다양한 곡선으로 가득차 있다.” 우리 한반도 곳곳에 산재한 무수한 곡선의 산능선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지요! 세계 어느 곳에도 이런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산능선들이 없습니다. 

 

참으로 성체성사적 삶이, 파스카 신비의 삶이 우리 모두 아름다운 곡선인생을 살게 합니다. 죽어 경직된 꼰대의 직선인생이 아니라 자유로우면서도 유연하고 신축성 좋은, 살아 있어 부드러운 곡선인생입니다. 바로 나이에 관계없이 영원한 청춘, 멋진 곡선인생의 모범이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바로 오늘은 현임 교황이 제정한 가톨릭교회의 제4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연중 제17주일 가톨릭교회의 양대신문의 1면 톱기사에 이어 몇면에 상세히 보도할 정도로 교회와 정치지도자들은 물론 세인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1인가구와 노인' 문제에 관한 시사적 주제에 내용이었습니다.

 

“1인 가구는 외롭다, 통계청 집계 2022년 1인 가구 34.5%, 혼밥 혼술은 쉬운데 홀로 신앙은 어렵네요! 1인 가구 급증하는데 교회 관심은 제자리, 1인 가구 위한 사목에도 관심가져야, 1인 가구는 말한다 ‘공동체가 필요해!”<가톨릭평화신문>

 

1인 가구 시대에 날로 절실해 지는 교회 공동체성이요, 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성체성사적 삶임을 절감합니다. 교회공동체와 성체성사는 하나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공동체에서 거행되는 성체성사의 공동체성을 능가할  선물은 없습니다. 현 혼란기에 인류에 주신 하느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성체성사, 이 거룩한 미사잔치이자 제사입니다. 또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이하여 시급히 부각되는 노인문제입니다.

 

“노인들 소외되지 않도록 찾아나서는 교회돼야, 노인 요양 사목 관심 필요하다”란 제하에 현실 문제가 가톨릭신문 몇면에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교황님의 담화문도 구구절절 아름답고 참 깊었습니다. 지면상 인용하여 소개 드리지 못함이 유감입니다만 꼭 찾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교회 문헌보다 아름답고 깊고, 풍요하고 정확한 글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 양대 문제의 절박한 현실에 자랑스럽게도 성체성사의 공동체성이, 성체성사적 삶이 유일한 대안으로 부각됩니다. 바로 이런 현실에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복음의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가 성체성사적 삶에 빛나는 비전을 제시합니다. 제1독서 엘리사의 기적은 이의 전조일뿐 파스카 예수님의 성찬례에는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첫째, 봉헌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결정적인 요소가 봉헌입니다.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행복, 봉헌의 축복, 봉헌의 기쁨, 봉헌의 기적...,끝이 없습니다. 믿는 이들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봉헌의 삶입니다. 바로 성체성사의 빛나는 상징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아이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봉헌에 이은 파스카 예수님의 결정적 봉헌이 짧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회의하는 안드레아의 반응에 관계없이 봉헌의 진수를 보여주십니다.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여라.”

 

착한목자 예수님께서 광야여정중 배고프고 고단한 5천여명 인생들에게 시편23장처럼 푸른 풀밭에 앉히시고 배불리 먹이십니다. 광야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오아시스와 같은 쉼터, 샘터, 배움터가 되는 교회공동체 미사를 상징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눠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합니다.

 

둘째, 나눔의 삶입니다.

봉헌의 기적이 나눔을 통해 실현됩니다. 어린 아이가 먹을 것 모두를 봉헌한 사실에 부끄러움과 동시에 감동한 군중들은, 이어 혼신을 다해 정성껏 하늘 축복을 갈망하며 이 모두를 손에 들고 감사로 봉헌하는 예수님께 감동하여, 각자 꼬불쳐 숨겨 둔 먹을 것을 모두 비워 나눕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에 가득찼다 하니 봉헌의 기적은 바로 나눔의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시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누지 않아서, 분배정의가 실현되지 않아서입니다. 하느님 탓인 천재가 아니라 인간의 탓인 인재이나 바로 탐욕과 무지로 인한 독점과 자원의 남용 때문입니다. 사람죽이는 전쟁을 위한 무기생산으로 쓰이는 돈만 고루게 나눈다면 식량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것이나 언제 이럴때가 올런지요?

 

바로 성체성사적 삶이 이런 깨달음을 깊이하며 각자 나눔의 실천의 삶에 매진하게 합니다. 정말 가톨릭교회를 믿는 정치지도자들이 공정과 정의의 사람들이 되어 이런 나눔의 삶을 정책적으로 실현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베네딕도 16세의 교황의 결단에 버금가는, 노령으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임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칭송도 자자합니다. 

 

권력 독점이 아니라 때가 됐을 때 겸손이 권력을 내려놓고 아름답게 떠남으로 나눔의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59세 해리스 부통령을 지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미래 세대에게 횃불을 넘기는 것”이란 말도 멋졌습니다. 오랜만에 검은 먹장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을 본 느낌에 마음도 상쾌했습니다.

 

셋째, 일치의 삶입니다.

치유와 구원의 일치, 화해와 평화의 온전한 일치는 하느님 중심의 성체성사적 삶에서 가능합니다. 봉헌의 삶, 나눔의 삶에 이은 순리적 현실입니다. 봉헌과 나눔의 사랑이 일치의 삶을 견고히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멋진 권고와 고백이 참 아름답고 깊으며,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바로 성체성사의 은총이 이런 우리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합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금과옥조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이 깊고 아름다운 진리 말씀입니다.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은혜로운 다양성의 아름다운 일치의 삶인지요! 이 모두를 깨달아 살게 해주는 성체성사적 삶의 은총에 감사할 뿐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아름다운 성체성사적 삶을 충실히 잘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7).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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