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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 요한 11, 19 ㅡ 27
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7-28 조회수50 추천수3 반대(0) 신고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11,27)

‘기도와 활동’은 교회의 오랜 논제입니다. 문제는 기도와 활동 사이의 괴리가 아닌 조화와 통합입니다. 모든 영성 학교가 답변을 내려야 하는 결정적인 질문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활동)와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기(=관상)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상과 활동 사이의 조화 보다 관상에 우위를 제공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마르타(=활동)와 마리아(=관상) 자매 사이에 서열을 매기는 오류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그 복음적 근거가 바로 지난 16주일 복음의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10,41.42)라고 표현하신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갑작스레 마리아 축일은 없는데 마르타 축일은 있었다, 는 사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으로 묵상을 시작합니다. 물론 2021년부터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로 바뀌었지만 말입니다. 

환대의 여인인 마르타의 축일에서 기념일로 바뀌었지만, 우리가 오늘 듣는 독서와 복음은 변함없이 둘 다 요한의 편지와 복음입니다. 요한은 오늘 편지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4,7~8)하고 선언함으로써 ‘하느님은 사랑이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사랑의 신비를 요한은 자신의 뛰어난 통찰로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어쩌면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가 알고 있었던 앎은 사변적인 앎이 아닌 경험적인 앎이며, 무엇보다도 예수님과의 관계 체험을 통한 사랑의 앎이라고 봅니다. 

마르타의 가족은 예수님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한 가족이었습니다. 어쩌면 동생 마리아와 함께 마르타 역시 순수한 사랑의 경쟁(?)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예수님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11,22)하고, 또한 “마지막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1,24)하고 고백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바를 표현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랑의 여인이었고, 그 사랑의 힘으로 예수님께 자신이 바라는 바를 기꺼이 요구할 수 있는 당찬 여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마침내 사랑의 앎에서 솟아나는 믿음으로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11,27)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했던 마르타와 마리아는 진정 사랑의 여인들이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고백한 사랑은 바로 인생의 길에서 지치고 힘든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환대의 사랑이었고, 자신의 소중한 것, 향유를 다 쏟아부어 사랑을 표현함으로 이런 환대와 사랑을 확인하고서,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꿋꿋이 걸어갈 힘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 중 되찾아야 할 영성의 요인 중 하나가 환대의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마르타 기념일에서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로 변경되었지만, 환대의 중요성을 교회가 배제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의 집은 여전히 곧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나그네들을 위한 환대의 집’이요, 교회 구성원은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처럼 ‘환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마르타 가족의 환대의 원천은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을”(마태11,28) 언제나 기꺼이 환대하셨고 당신 안에서 참된 쉼을 갖도록 초대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환대를 실행한 사람이 바로 마르타와 그 가족들입니다. 우리 역시도 오늘을 살면서 마르타와 그 가족들처럼 누군가를 기꺼이 환대하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간청하면서 「환대란?」 글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렵니다. 

『환대란 낯선 사람이 들어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환대는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환대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을 자신의 방식으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다.  환대에 숨어 있는 역설은 환대가 비어있음을 창조하기 원하기는 하지만 두려움으로 가득 찬 비어있음이 아니라 낯선 이들이 그 공간에 들어와 자신이 이미 자유롭게 창조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는 친절한 비어있음을 원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자신의 춤을 출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의 부름을 따라 원할 때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그런 비어있음이 환대이다. 우리가 진정 환대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면 단순히 낯선 이들은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중적이지 않은 명료한 우리의 존재감으로 낯선 이들을 만나고 중립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의견, 우리의 삶의 방식을 명료하고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명료하게 드러난 우리의 선택과 태도, 관점을 보면서 낯선 이들이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게 되고 스스로 자신의 관점을 탐구하게 되는 경계와 경계의 만남이 열리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과 진정한 소통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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