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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길 잃은 양’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누구든지.>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8-12 조회수38 추천수2 반대(0) 신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5).”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0.12-14).”

 

 

 

1)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가르침이고,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어린이처럼 되어라.”,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라.” 라는

 

말씀은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는,

 

뜻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회개’는, 여기서는 각자 자신의 교만을 버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나는 교만했던 적이 없다.

 

나는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다.” 라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말은 그렇게 안 하더라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주장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백 퍼센트 위선자이고,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위선과 교만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2) ‘되찾은 양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잃은 양’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이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는 의인들의 실제 수가 아니라,

 

양을 잃었을 때의 목자의 슬픔과

 

되찾았을 때의 기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의인들과 죄인들의 실제 비율은 ‘99대1’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을 반영한다면 ‘1대99’ 라고 말해야 할 텐데,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길 잃은 양’이고,

 

회개해야 할 죄인들이고,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지옥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가는 곳이고,

 

하늘나라는 ‘회개한 죄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또는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성모님 외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또 늘

 

하느님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 ‘회개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3)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히브리서에 있는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1-2).”

 

이 말에서 ‘손님’은 ‘낯선 나그네, 뜨내기’를 뜻하기도 하고,

 

‘작은 이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뜻하기도 합니다.

 

‘천사들’을 접대했다는 말은, 하느님을 접대했다는 뜻입니다.

 

‘나보다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곧

 

주님께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작은 이들이 곧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오실 때 ‘나보다 작은 이’의 모습으로

 

오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천사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는 말씀은,

 

작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수호천사들이 곧바로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는 뜻이고, 다시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자기보다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학대하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죄’이고, 그것은 심판 때에

 

엄한 처벌을 받게 되는 죄입니다.

 

 

 

4) 그러면 그 죄를 짓는 사람 쪽에는 수호천사가 없는가?

 

있다면 왜 그렇게 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가?

 

위선자들, 교만한 자들, 작은 이들을 학대하는 자들 쪽에도

 

분명히 수호천사가 있고, 양심을 통해서,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통해서, 또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그러면 안 된다고 계속 타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과 교만한 자들 쪽에서 그 ‘사랑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수호천사의 반대쪽에는 마귀들이 있습니다.

 

마귀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학대해도 된다.” 라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너는 지금 충분히 겸손하다.”, “너는 죄가 없으니 특별히

 

회개할 것이 없다.” 라고 유혹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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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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