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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수철 신부님_주님 중심의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8-13 조회수77 추천수5 반대(0) 신고

 

“참 좋은 교회 공동체”

 

 

“온갖 재산 다 얻은 듯, 

 당신 법의 길 걸으며 기뻐하나이다.

 당신 법이 저의 즐거움, 그 법은 저의 조언자이옵니다.“(시편119;14,24)

 

제 사랑하는 고향집이 구암리카페가 되었다해도 고향집에 대한 사모(思慕)의 정(情)은 날로 깊어갈 것입니다. 첫 사랑의 추억처럼 늘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구암리 카페가 프란치스코 수사 강론 카페처럼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며 기도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도 이런 공동체일 것입니다.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 "인(人)"자 글자 자체가 공동체적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공동체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공동체를 만듭니다. 공동체의 붕괴와 파괴가 인간성 상실의 원인이 됩니다. 

 

예전 마을은 하나의 커다란 가정과도 같은 공동체였습니다. 요즘은 마을도 사라져 갑니다. 인구도 줄어들고 또 사람들도 편중되어 있어 균형과 조화의 마을 공동체를 이루기도 쉽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람은 누구나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소속감을 지니고 싶어하며 나름대로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갑니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거나 공동체의 지지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고 허약한지요! 날로 늘어나는 1인가구에 가톨릭교회 공동체의 역할이 날로 증대되고 있습니다. 홀로든 함께든 모두를 하느님 품에 안고 하나의 인류가족공동체로 살아가도록 하는 가톨릭교회의 미사전례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남남의 사람들이 미사은총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범(汎) 인류의 교회 공동체가 우리의 미래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도대체 가톨릭교회의 미사전례가 아니고 이렇게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지요!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공동체 생활에 지혜를 제공합니다.

 

“작은 문턱에 걸려 넘어질지언정 산에 걸려 넘어질 일은 없다. 그러므로 마무리를 지을 때의 자세는 낮고 또 낮아야 한다.”<다산>

“발걸음은 항상 정중하게 하고, 손놀림은 항상 공손히 하라, 걸을 때는 땅을 가려서 밟고, 개미 한 마리(개미집)라도 밟지 마라.”<경재잠>

 

경재잠(敬齋箴)은 주자가 서재의 벽에 써붙이고 스스로 경계한 잠으로, 옛날 서원학생들 기숙사 중 하나인 경재(敬齋) 앞에 내걸어 학생들을 훈계하였기에 경재잠(敬齋箴)이라 부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전 공부는 주로 군자가 되는, 성인이 되는, 즉 참사람이 되는 공부였음을 봅니다. 오늘날 문사철(文史哲)의 인문학은 날로 쇠퇴하고 실용학문의 공부가 주류인 세상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평생공부는 참사람되는 공부임을 봅니다. 사제가 수도자가 신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성철 스님이 입버릇처럼 했던, “사람 못된게 중되고, 중 못된게 수좌되고, 수좌 못된게 부처된다” 라며 선방 수좌들을 세속의 기준으로 가장 못된 인간들이라고 일갈했던 말씀도 생각납니다. 토마스 머튼에 대한 후대의 평가, 즉 “머튼은 가톨릭인이기보다는 크리스천이었고, 크리스천이기보다는 종교인이었고, 종교인이기 보다는 인간이었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괴물이나 폐인이 아닌 참사람이 되는 공부가 얼마나 힘든 평생공부인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이 되기 위한 공동생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는 참사람되기 위한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 생활의 비결을 배웁니다. 참으로 어린이처럼 편견이 없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예수님을, 작은 이들을 끔직히 사랑했던 예수님을 배워 닮는 것입니다. 공동체 성원들이 서로 맞추려 하다보면 공동체의 일치는 요원합니다. 그러니 모두가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자기를 맞춰 주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서 몸소 깨달아 실천한 진리들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사람이 되는 비결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어린이는 편견이 없고 순수하며 개방적이고 유연합니다. 이 또한 부단한 회개의 열매입니다. 이런 이는 그대로 주님의 현존이요 이런 이를 받아들임은 그대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작은이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 애정의 관심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있는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작은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사는 그대로 하느님의 관심사를 반영합니다. 작은 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그대로 주님께 대한 무시의 대죄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대로 끊임없는 회개로 어린이처럼 낮아져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참사람이 되는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자비로운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의 참사람들이라면 끊임없는 회개로 어린이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는 공부와 더불어 작은 이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사랑 공부는 평생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답은 단하나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과의 일치의 우정관계를 날로 깊이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불림받은 예언자 에제키엘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에제키엘이 삼킨 두루마리가 상징하는바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성체요 말씀입니다. 주님은 두루마리를 에제키엘 입에 넣어주며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에제키엘이 먹었더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합니다. 주님은 두루마리를 먹이신 다음 말씀을 선포하라 명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에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에제키엘 역시 후대의 바오로처럼 똑같이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주님이시다.”(갈라2,20) 라고 고백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예닮의 여정’중인 우리 모두에게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성체와 말씀을 두루마리를 먹이심으로 당신과의 일치를 깊이하시고, 당신을 닮은 참사람으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당신 법은 제 마음의 기쁨, 영원히 저의 재산이옵니다.

 당신 계명을 열망하기에,  

 저는 입을 벌리고 헐떡이나이다.”(시편119;103,111,113).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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