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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사랑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8-23 조회수49 추천수1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4-40).”

 

1) 여기서 ‘시험하려고’는 ‘함정에 빠뜨리려고’입니다.

이 말은 앞의 15절,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까 하고

의논하였다.”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논쟁을

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 논쟁에서 무엇이든지 꼬투리를

잡아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교회와 신앙인들을

공격하려고, 또는 시빗거리를 찾으려고 의도적으로

성경이나 교리에 관해서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일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티모 2,11-15).”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과 ‘믿는 대로 사는 삶’으로 이루어집니다.

언제나 항상 말보다 삶이 먼저입니다.

말을 잘하면 논쟁도 잘하겠지만,

논쟁으로 상대방을 감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반감과 적대감만 더 키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속마음을 알고

계셨겠지만 개의치 않으시고, ‘사랑’이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율법학자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뜻으로

‘가장 큰 계명’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라는 말은,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자체로 ‘사랑’이기 때문에, 계명을 실천하는 일도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다하고 당신의 목숨을 다하고 당신의 정신을

다하여 너를 사랑하시니 너도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이 말을, 하느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고 아드님만

세상에 보내서 희생시키셨다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께서 외아드님의 목숨을 내주신

일은 곧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사랑이란, 내가 원해서,

또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인데 ‘해야 한다.’ 라는 계명으로

정해서 명령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사랑’을 ‘명령’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과 ‘계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긴 합니다.

여기서 ‘계명’은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을 나타내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심정을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 또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3)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은,

표현만 다를 뿐이고, 뜻은 ‘하느님 사랑’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요한 15,12).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4) 신앙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그것과 똑같이 ‘사랑’도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도 괜찮고, 사랑이란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온 마음과 온 삶을 다하여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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