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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바로 내가’ 그들보다 더 위선자일 수 있습니다.>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8-25 조회수35 추천수2 반대(0) 신고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마태 23,13-22).”

 

 

 

1) 옛날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이 얼마나

 

심했는지, 또 그들이 얼마나 지독한 ‘위선자들’이었는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

 

무슨 의미가 있는 일도 아닙니다.

 

(옛날 일에서 교훈을 얻는 정도의 의미는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위선자인가, 아닌가?”를 반성하는 일입니다.

 

 

 

2)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누군가가 위선자라고 비판하면 화부터 냅니다.

 

<“나는 진실한 사람이다.” 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따라서 ‘위선’이라는 함정에서(‘죄’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먼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부터 인정해야 하는데,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고 깨닫지 않는다면,

 

남이 어떻게 해 주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엄하게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가운데에는

 

그 꾸중을 달게 받아들인 사람도 없고,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한 사람도 없고,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과

 

반감만 점점 더 크게 키우다가 결국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에도 비슷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인들 가운데에는 내부의 박해를 겪은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내부를,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누군가가 비판을 할 때, 그 비판을 받아들이는 일은 드물고,

 

거의 항상 “너나 잘해라.”, 또는 “너부터 잘해라.”,

 

또는 “너도 위선자다.” 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물론 비판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순서이고, 그리고 남의 위선을 비판하는 일을 잘하는

 

그 사람이(바로 내가) 더 위선자인 경우가 많긴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위선을 비판하고 꾸짖는 일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우리는 ‘모두 함께’

 

겸손하게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4) ‘위선자들’과 ‘위선’에 대해서 말하려면,

 

“나도 위선자일 수 있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선 먼저 ‘나의 위선’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부터 해야만

 

‘남의 위선’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사도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케파가(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바오로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1-14)”

 

사도단의 대표이며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데도,

 

열두 사도가 아닌 사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것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바오로 사도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뉘우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먼저 위선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위대한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비판한 바오로 사도 자신은 어떤가?”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칠삭둥이 같은 나,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위선’은 항상 ‘교만’과 짝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겸손하게, 진심으로 자기를 낮춘

 

바오로 사도는 위선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맹세 관습에

 

대해서 상당히 길게 꾸짖으시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설교에서 ‘맹세의 원칙’과 같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4-37).”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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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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