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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준수 신부님의 (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 마르코 6, 17 - 29
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8-28 조회수64 추천수2 반대(0) 신고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6,25)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입니다. 교회가 세례자 요한 성인의 탄생과 죽음을 기념하는 일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이는 곧 세례자 요한의 삶이 예수님의 구원 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감사송에 이렇게 세례자 요한을 증언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나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저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먼저 생각났습니다. 이 우화는 아무도 임금님께 진실을 말하지 않았잖아요. 왜냐하면 힘이 있는 사람들은 자주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나쁘게 쓸 수 있다, 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어린아이는 거짓을 모르기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순수한 눈과 솔직한 목소리를 가져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권력이나 지위, 계급이 가진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잘못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것은 솔직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확신과 절대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 정의와 진실을 향한 의지의 문제라고 세례자 순교 축일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가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대목은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열두 제자의 파견((마르 6,7-13)과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6,30-44) 사이에 삽입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미 과거사가 되어 버린 요한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굳이 여기에 삽입한 이유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두고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난 것이다.”(6,14)하고 착각하고 있었으며, 이 소문을 들은 헤로데 역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6,16)라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시점에 요한은 헤로데의 군사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고(1,14), 오늘 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공교롭게도 헤로데가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헤로디아의 꾐(6,19-28)에 빠져 세례자 요한을 목 베어 죽임으로서 그의 사망일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도덕적으로 건전하지 못하고 부적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들은 것은 하느님의 꾸짖음이었건만 그는 오히려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고 그의 목을 베어 죽임으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먼저 그는 자기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한 것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이었습니다. 율법에도 “네 형제의 아내의 치부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네 형제의 치부이다.” (레18,16)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무력한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이런 패륜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충언을 무시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점이 다윗 왕과의 차이점인지 모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취함으로 인해 나단 예언자로부터 질책을 들었을 때, 담요가 젖도록 밤새 회개하는 통회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거절하고 오히려 그를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헤로데는 사람들 앞에서 경솔한 맹세를 해서 인생 일대 최악의 실수, 대형 사고를 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부하신 것처럼 맹세는 함부로 하면 아니 되는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석에서 자기 기분에 들뜨고 살로메의 춤에 매료되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6,22)라는 약속을 맹세한 것입니다. 그 맹세가 올무가 되어 결국 그는 의인인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는 엄청난 역사적 범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을 범하고서도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 번민은 했지만 회개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나 활동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는 두려움에 떨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의 순교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세례자 요한은 불의한 일을 질책하는 일에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대 권력자인 왕을 찾아가 그의 면전에서 그의 부도덕함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질책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예언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세례자 요한은 진리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미구에 예수님 또한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죽으실 것을 예표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주님으로 하여금 이제 요한이 준비하고 마련한 그 길을 통해 적극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모두 그리스도가 아니지만,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이 진리와 정의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예언자적 삶을 살도록 불림 받았음을 오늘 기념일은 우리를 자극하고 도전합니다. 

“악인은 제 악함 때문에 망하지만, 의인은 죽음에서도 피신처를 얻는다.”(잠14,32)라는 말처럼, 헤로데는 자신이 범한 그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그와 반대로 세례자 요한은 한낱 못나고 치사한 임금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요한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결과로 말미암은 순교를 통하여 그가 바라던 하느님의 피난처, 성채이며 보루인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5,10)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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