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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루가 9, 23 ~ 26
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9-19 조회수108 추천수4 반대(0) 신고

신학생 시절 읽었던 ‘엔또 슈사꾸의 침묵’은 제게 큰 감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은총이라는 어느 시골 신부의 마지막 표현처럼 “모든 것은 다 은총입니다.”라는 점을. 생명도 죽음도, 배교도 순교도, 다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소설이었습니다. 「침묵」은 이렇게 그 내용을 전합니다. 『일본에서 선교하던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이 본국에 전해집니다. 제자였던 ‘로드리고’ 신부는 사실 확인을 위해 일본 선교를 지원합니다. 잠입에 성공하지만, 그 역시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성화’를 밟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가 거절하면 할수록, 그의 신자들은 더욱더 참혹한 고문을 받습니다. 자기로 인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교우들을 보면서 신부는 고뇌에 빠집니다. 배교해서 죽어가는 그들을 살려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신앙을 위해 그들의 처절한 죽음을 묵인해야 하는가? 어느 것이 참된 사랑인가? 고뇌의 늪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한다. 밟는 네 발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다.’ 로드리고의 말이 이어집니다. ‘주님, 당신의 침묵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다.’ 마침내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은 한국순교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103위 시성식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조금은 길지만 읽어 보렵니다. 『그리스도 신앙에 더 깊이 들어가기를 갈망하던 여러분의 선조들은 1784년에 자기들 중 한 사람을 북경으로 보냈고, 그는 거기서 영세하였습니다. 이 좋은 씨앗으로부터 한국에 첫 그리스도 공동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도들 자신에 의해서만 세워졌다는 점에서 교회 역사상 유일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신생 교회는 아직 어리면서도 믿음에는 그토록 굳세어, 몹시 사나운 군란을 거듭 견디어 냈습니다. 그리하여 한 세기도 채 못되어 1만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를 자랑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는 1791년 신해, 1801년 신유, 1827년 정해, 1839년 기해, 1846년 병오, 1866년 병인 년에 순교하신 순교자들의 피로써 영구히 새겨져 있습니다. 그분들은 혈통으로나 언어로나 문화로나 여러분의 조상입니다. 아울러 그분들은 피로써 증거한 신앙에 있어서도 여러분들의 부모들이십니다. 열세 살 난 소년 유대철 베드로로부터 일흔 둘의 노인 정의배 마르코에 이르기까지 남자, 여자, 사제, 신도, 부자, 빈자, 상인, 양반 할 것 없이 모두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죽어 가셨습니다.』

한마디로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 없이 자생으로 태어난 세계 유일무이한 교회라는 점과 갓 태어난 신생 교회는 곧바로 수없이 끔찍한 박해를 굳건히 이겨냈고, 짧은 세월 안에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장한 순교자들을 배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순교자들의 후손이며, 그분들이 피로써 지킨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순교자들은 끊임없는 고통 중에도 늘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 내셨고, 그 사랑으로 희망을 사셨던 분들이셨습니다. 이는 오늘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8,35.37) 그러기에 한국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려고 순교하였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유혹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절대 가치로 여기고, 그 가치를 위해 온 삶을 투신한 분들이 오늘 우리가 기리는 순교 성인들입니다. 그분들의 위대한 삶을 뒤따르는 것이 후손인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조들이 사셨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가치가 마치 절대 가치인 양 여겨지는 세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싸워나가야 할 적은 선조들이 겪었던 박해라는 물리적인 고통이 아닙니다. 오히려 장밋빛으로 위장된 갖가지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유혹들입니다. 이런 유혹이 더 심해지고 있는 오늘이라는 현실은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신앙인에게 근본적인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선택을 위한 우리 모두의 내면적인 투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치열한 싸움의 순간이 우리에게는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대 가치를 살아가기 위해 내려야 할 선택의 순간은 어떤 이유에서든 미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복음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9,23)하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는 본래 사람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던 잔인한 사형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십자가가 생명과 부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온전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3, 8)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온전히 자신을 버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의 생활을 청산하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차지한 자리를 예수님께 내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는 것은 자기의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자기를 위하는 이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욕심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없으면 삶의 의욕도 없고 성취 욕구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결국 자신을 힘들게 마침내 멸망시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는 것은 곧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포기하고, 이기심과 명예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내적 문제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외적 문제입니다. 고통도 죽음도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그 고통과 고생이 의미 있는 고통인가, 무의미한 고통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당신 몸소 친히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당신의 제자라면 신앙으로, 사랑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생명의 길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도록 초대하고 격려하십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누구도 십자가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과 자기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9,24)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곧 순교자의 삶을 사는 길이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거룩한 산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피 흘림의 적색 순교란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만 가능하지만, 피 흘림 없는 백색 순교는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서 자신이 죽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살아가는 삶이기에 이보다 더 거룩한 순교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서 쉽게 지칠 수도 있고 중간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가신 예수님은 물론 오늘 우리가 현양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을 바라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기꺼이 사랑으로 바친 순교자들을 뒤따르도록 은혜를 청합시다. 『순교로 빛을 밝힌 백삼위 성인 오롯이 바친 넋에 새순이 돋아 순례의 교회안에 큰 나무되니 님따름 그 생애가 거룩하여라 영원히 받으소서 희망의 찬미 찬송을 이름모를 순교자여 새빛되소서』(성가, 103위 순교성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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