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30주일 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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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10-27 | 조회수123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연중 제30주일 나해] 마르 10,46ㄴ-52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우리는 삶에 어렵고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하느님께서 그것을 해결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내가 지닌 부족함과 약함을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그래서 내 뜻과 바람을 이뤄주시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없애 주시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그런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께도 그대로 투영되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도 초반엔 예수님께 그런 기대와 바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구약 시대부터 메시아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자주 불리던 것으로, 다윗 임금이 이루었던 부강한 이스라엘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즉 유다인들은 다윗 임금이 이루었던 위대한 성공과 업적을 그의 자손이 재현해 주리라고 믿었는데, 그런 믿음과 기대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던 그가 예수님께 가장 먼저 청한 것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자비’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만 했던 다른 이들과 달리, 바르티매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명확히 꿰뚫고 있었지요. 병을 치유해 주시는 것도,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도, 빵의 기적으로 궁핍한 이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것도 모두 우리를 보살피시고 살리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하느님의 그 자비를 온전히 믿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분 손길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한 채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명하고 따를 수만 있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것들을 받아누리게 될 터이니 굳이 다른 걸 청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지요. 그래서 큰 소리로 반복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만 청합니다. 하지만 그런 의중을 알 리 없는 이들에게는 그 외침이 그저 의미없고 시끄럽기만한 ‘소음’으로 들렸기에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반면에 예수님만은 그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기에 제자를 시켜 그를 당신 앞으로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갑니다. 겉옷을 벗어 던지는 행동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그의 비장한 각오가 분명히 드러나지요.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에게 겉옷은, 특히 가진 게 별로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는 천막이 되고, 밤에는 매서운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이불이 되는, 어쩌면 바르티매오에게는 ‘전부’나 다름 없었던 것이 바로 겉옷이었을 겁니다. 그런 겉옷을 버리고 주님께 간 것입니다. 얼마 안되는 그 겉옷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에 걸림돌이 될까봐, 겨우 천쪼가리에 의지하려는 마음 때문에 자기 마음이 주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향하지 못하고 갈라질까봐 과감하게 내던져 버린 것이지요. 그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없지만 그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닙니다. 과감한 비움을 통해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잘못된 욕망을,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앉아서 남들 위에 군림하고 대접 받으려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쉽고 편한 것만 찾으며 ‘십자가’를 외면하려는 나약한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시면 지체 없이 ‘벌떡’ 일어나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당신 앞으로 나아간 바르티매오에게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셔서 물으신 게 아니라, 바르티매오가 마음 속에 품어야 할 참된 갈망이 무엇인지를 일깨우시기 위한 질문입니다. 바르티매오의 소망은 ‘다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아나블레포’는 ‘위’라는 방향을 뜻하는 전치사 ‘아나’에 ‘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블레포’가 합쳐져서 ‘올려다보다’라는 뜻이 됩니다. 바르티매오는 잃어버린 시력을 회복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시력을 회복한 그 눈이 다시 그전처럼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을,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삶과 세상을 통찰하며 그 안에 깃든 하느님의 섭리와 신비를 알아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힘들고 괴로운 순간이 찾아와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희망하며 끝까지 힘을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도 이 바르티매오처럼 ‘다시 보기 위해서’입니다. 세례 받고 난 후에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새로워진 시선으로 세상과 삶을 다시 보지 못하고, 욕망과 집착에 얽매인 세속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려고 하면 아무리 성당에 열심히 다녀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먼저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새로워져야 내 삶도, 내가 사는 세상도 그분 뜻에 맞게 변화되는 것이지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다시 보고자 했던 바르티매오는 그 믿음을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듯, 바르티매오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덕분에 구원받을 기회를 얻었지만 그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기 전까지 그의 구원은 아직 ‘미완성’의 상태인 겁니다. 그 구원을 완성시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한 계명과 주님 말씀을 삶 속에서 행하는 ‘실천’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라가야만, 주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 과정에 따르는 고통과 시련을 기꺼이 감내해야만, 그에게 열린 구원의 가능성이 ‘하느님 나라’라는 완성된 상태로 실현되는 겁니다. 바르티매오도 그것을 알았기에 시력을 회복한 뒤에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합니다. 어렵사리 얻은 은총과 구원이라는 ‘새 술’을 ‘새 부대’에, 즉 주님 뜻을 충실히 실천하는 새로운 삶 속에 담은 것이지요. 그 ‘새 부대’ 안에서 주님께서 주신 ‘새 술’이 맛있게 익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바르티매오를 본받읍시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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