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토요일 복음 : 우리는 얼마나 일꾼을 잘 관리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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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4-12-07 | 조회수4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오늘 복음은 사목하시는 신부님과 평신도로서 사목에 협력하는 신자들이 특히 주목해서 묵상해야 할 복음입니다. 얼마 전 동아일보 기사를 포털에서 봤습니다. 천주교와 조계종을 언급하면서 향후 10년 정도 지나서는 심각한 성소자 부족현상에 직면할 거란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를 보고 난 후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조계종은 동남아 쪽에서 스님을 모시고 와야 할 정도로 심각하고 우리도 그와 같은 비슷한 양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였습니다.
이미 이건 사실 지금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예견된 현실입니다. 신학생이 적어서 부산가톨릭대학도 폐쇄를 하고 그쪽 신학생이 광주가톨릭대학 신학교로 가 통합하는 현실을 봐도 그렇습니다. 이 앞전에 보면 옆 본당도 작은 수녀님이라고 해서 오셨는데 처음엔 오히려 원장 수녀님보다 더 연세가 들어보일 정도였습니다. 실제 연세는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랬습니다. 수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소자가 많이 줄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추세로 간다면 앞으론 수녀님이 안 계시는 본당도 세월이 지나면 많이 생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성소자는 갈수록 줄기 때문에 그렇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지금 이게 우리 교회가 당면한 현실입니다. 사실 천주교회도 이런 현실이 심각하다는 것은 인식은 하는데 그렇다고 뾰족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대책을 세우려고 해도 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넋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걱정만 태산일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단 한 줄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해드렸는가 하면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해야 이런 게 좀 심각하다는 걸 좀 더 피부로 느낄 수 있어서 약간 상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실제 더 이야기를 하자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인식하면서 오늘 복음을 한번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일꾼이 부족하신 것에 대해 염려를 하십니다. 일꾼이 부족하다는 것은 해야 할 일은 많은데 그 일을 해낼 케파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특이한 본당을 제외하고는 이와 같은 게 현실적으로 전국 어느 본당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개신교는 아직까지는 우리와 비교해서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만 천주교는 상당히 고령화된 게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전반적인 현실을 고려했을 때 지금까지 영세받은 지 13년 하고 1개월 동안 보고 느낀 점을 토대로 앞으로 우리 교회가 어떤 부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인지를 한번 체크해보고 싶습니다.
원론적으로는 유입, 즉 다시 말해 세례 받는 사람이 많이 늘어야 하는데 실제는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유입보다는 이탈을 막아야 합니다. 여기서 이탈은 냉담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가정을 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가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정을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이 온전히 신앙생활을 잘 해서 냉담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는 가정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성직자, 수도자 수 감소 걱정은 별론으로 하고 교회로서는 축복입니다. 이건 너무 과한 가정이고 반만 제대로 계속 신앙을 유지하기만 해도 엄청날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개신교랑 비교하면 천주교가 대처하는 능력은 아주 부족합니다. 예전에도 언제 한번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사자 새끼 생존방식으로 생존해야 계속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만 주고 나면 세례 이후 케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 이후에는 각자도생입니다. 각자도생을 잘 하면 살아남고 여기서 생존하지 못 하면 냉담으로 이어집니다. 이번 서울대 교수님들의 시국선언문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영혼 없는 지식인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마치 이 표현과 같습니다. 좀 리얼하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애만 낳고 자식을 방치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여기서 교회는 부모와 같습니다. 자식은 신영세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좀 더 나아가 깊이 생각해봐야 하고 성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이런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기존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건 제가 개신교와 비교해봤을 때 사목자도 마찬가지이고 또한 사목을 보조하는 일반 평신도 간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성당 나오지 않는 것도 그렇고 성당을 옮겨도 정당한 사유가 있어서 옮기면 모르는데 이사를 한다든지 하는 경우처럼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외 다른 사유로 옮긴다고 했을 때 지금까지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입니다. 물론 전체 가톨릭 측면에서 보면 이탈은 없지만 한 본당 공동체 관점에서 보면 손실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부분에 대해 상당히 무감각한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표현처럼 길 잃은 양이 된 것과 같습니다. 세례는 운전면허를 획득한 것과 같습니다. 운전면허를 획득했으면 도로 주행을 많이 하고 새로운 길도 익히면서 운전감도 읽혀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사고가 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고가 나지 않기 위해서는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때까지는 지속적인 케어가 필요하듯이 교회도 신자를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조성해 인공위성이 안전궤도에 진입할 때까지 지상관재소에서 계속 예의주시하듯이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해야 교회의 앞날이 밝지 그렇지 않으면 정말 유럽 교회가 지금 처한 현실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는 걸 깊이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런 현실을 예수님께서 바라보시게 되면 내가 이런 모습을 보려고 십자가상 죽음을 겪어야만 했는가 하는 자괴감을 느끼실 것 같다는 묵상도 해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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