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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영근 신부님_“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루카 3,5)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12-08 조회수94 추천수4 반대(0) 신고

* 오늘의 말씀(12/8) : 대림 제2주일

* 제1독서 : 바룩 5, 1-9. 제2독서 : 필리 1, 4-6, 8-11

* 복음 : 루카 3, 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오늘의 강론>

이제 우리는 대림 2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대림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이미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에 대한 갈망과 희망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희망을 품고 그분이 오시길 노래한다. ‘김지하’ 시인은 아프고 어두웠던 암흑의 군사독재 시절에 그 간절함을 이렇게 노래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메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금관의 예수)

오늘 말씀전례에서, <제1독서>와 <제2독서>와 <복음>은 같은 메시지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바룩 예언자는 아주 특별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을 자녀를 잃은 ‘과부’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과 아름다움을 입어라.”(바룩 5,1)고 기쁨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바룩 5,9)고 말합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신자들을 위해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 1,10-11)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보기 위해, 우리는 지금 세례자 요한과 함께 ‘광야’에 나와 있습니다. 사실, ‘광야’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기에,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자신을 마주해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방이 트여 있어서, 어디 하나 숨을 데가 없으니 벌거벗고 자신의 실상을 낱낱이 확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우리 공동체가 바로 ‘광야’입니다. 제 실상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항상 고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체험하기도 합니다.

사실, 홀로 있을 때보다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가 훨씬 고독할 때가 많습니다. 홀로 있을 때는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 되고,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는 서로 다름과 차이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있을 때가 더 괴롭고 힘들고 고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이 ‘광야’로 불러내시어 사랑을 속삭여주십니다.

그러기에,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사막이요,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사막입니다. 곧 공동체가 저를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는 아름다운 저의 광야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가정이 광야요, 본당이 광야요, 직장이 광야요, 이 세상이 광야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요한은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루카 3,3)

이를 <마르코> 복음사가는 병행구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마르 1,4)

그는 용서를 선포하였지만, 결코 자신이 죄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죄의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까지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단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명을 지니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곧 ‘사명의 차이’뿐만 아니라, ‘신원의 차이’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은 용서를 위한 회개”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서의 회개’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한 회개는 하늘나라가 선물로 주어졌기에 그에 합당한 응답인 ‘결과로서의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위한 회개”가 아니라, “용서를 받았기에 하는 회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늘나라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기에 그에 합당한 삶으로서의 회개인 것입니다. 곧 우리의 회개가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가 먼저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이미 용서와 은총을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용서하고, 그 은총을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오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을 보내면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알아보고, 신뢰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감사의 응답으로 진정한 회개로 성탄을 기다리고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루카 3,5)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제 안의 굽은 곳, 거친 길을 새롭게 하소서.

오늘도 제 마음의 광야에

숨어계시는 현존으로 속삭이는 사랑의 노래를 듣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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