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회개는 ‘온 삶’의 변화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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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12-08 | 조회수33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은
서기 27년-28년경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기 시작한
시기는 서기 27년경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당시의 로마제국 통치자들의 이름과 시기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인간 세상의
역사에 연결시키기 위해서이고, 대사제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인간 세상
안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아버지의 뜻이 구체적으로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린 것은,
요한이 광야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에 관해서 1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루카 1,80).”
성경에서 광야는 시련의 장소를 상징하기도 하고,
은총의 장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은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내렸다는 말은,
요한이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셨고 뽑으신 사람이었는데(루카 1,12-17),
그를 부르신 때는 그의 나이 서른 살쯤 되었을 때입니다.
인용되어 있는 이사야서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듣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한 것은 아닙니다.
3절에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회개를
선포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을 보면,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1,28).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라는
말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회개하라고, 또 회개했다는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하였다.” 라는 뜻입니다.
2) ‘주님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는 “회개하여라.”입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는 ‘탐욕’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는 ‘교만’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에 물들어 있는 생활을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즉 하느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누구든지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메시아의 구원에는 민족, 인종, 신분, 직업, 남녀 등의
차별이 없습니다.
3) 세례자 요한은 뒤의 8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행동으로(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라는 뜻입니다(루카 3,11-14).
말로만, 또 생각으로만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가 진짜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한다면 ‘온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변화가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는 한 번 한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것도 회개이고, 그 길을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평생 끊임없이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4)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쳤습니다(마태 27,3-5).
그러나 그런 뉘우침은 회개의 시작일 뿐입니다.
죄를 뉘우쳤다면 보속도 해야 하고,
주님에게로 돌아가려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을 모두 합한 것이 회개입니다.
배반자 유다가 자살을 한 것은(마태 27,5)
회개하기를 포기한 것이고, 구원받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자살은 배반보다 더 큰 죄입니다.
<스스로 구원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절망하는 것’과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것’이 ‘죄 중에 가장 큰 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대림 제2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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