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대림 제2주일 나해, 인권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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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12-08 | 조회수64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대림 제2주일 나해, 인권주일] 루카 3,1-6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대림 제2주일의 복음말씀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그 배경이 되는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사실들을 꽤나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루카 복음사가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지요. 그 당시는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가 즉위하여 통치를 시작한 지 15년째 되는 해였고, 본시오 빌라도라는 인물이 총독으로 임명되어 유다지역을 관리 감독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주요 고을을 다스리던 영주가 누구였으며, 예루살렘 대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를 관장하던 대사제는 누구였는지 구체적인 이름들을 밝히고 있지요. 그렇게 하는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신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신기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분명한 ‘현실’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겁니다. 한 가지 의외인 점은 이 세상의 구원과 직결되는 중요한 ‘하느님 말씀’이 예루살렘에 있는 대사제나 율법학자가 아니라 먼 광야에서 은수생활을 하던 요한에게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다른 이들은 다 제쳐두고 요한에게만 말씀하셨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동안 여러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가지 방식으로 수 없이 당신의 구원계획을 말씀하셨지만, 재물과 권력에 대한 욕망에 휘둘려 세상 것들에만 귀를 기울인 이들에게는 그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에 비해 요한은 세상과 떨어진 ‘외딴 곳’에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깊이 머무르며 그분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에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을 받은 요한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소명을 시작합니다. 그에게 맡겨진 소명은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일이었지요.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는 여러 형태의 ‘세례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율법만 지나치게 강조하며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성전에서 행해지는 속죄예식을 사유화, 물질화하여 돈이 없어 그 예식을 치르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넣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반발하여, 물로 몸을 씻는 예식 만으로 자기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의식운동이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요한이 전개한 세례 운동에는 그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점이 있습니다. 즉 요한은 물로 죄를 씻는 세례는 일생에 한 번만 받을 수 있으며, 그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지요. 요한이 강조한 ‘회개’란 욕심에 눈 멀고 나태함에 안일해져 잘못된 길을 걷던 것을 중단하고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완전히 돌리는 일입니다. 그전까지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그분과 상관 없는 사람처럼 살았지만, 이제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전적으로 그분 뜻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다시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꾸준히 노력하는 일입니다.
요한이 그처럼 회개를 강조한 것은 그것이 우리 구원에 직결되는, 가장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님과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구원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일단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 ‘큰 길’은 하느님께서 친히 준비해두셨습니다. 이 점에 대해 오늘 제1독서인 바룩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즉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품으로 돌아가는 그 길의 중간에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당신 손으로 고통의 산과 시련의 언덕을 낮추시고 슬픔의 골짜기를 메워 평평하게만들어 주셨다는 겁니다. 모두에게 당신 나라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신 것이지요. 그렇기에 우리도 주님께서 나에게 오실 ‘작은 길’을 닦아야 합니다. 그 작은 길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 가운데에 계십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문 밖에 서서 내가 그 문을 열어드릴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빨리 나를 구원으로, 참된 행복으로 이끌고 싶지만 나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에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분께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드릴 수 있을까요?
그 방법에 대해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첫째, 골짜기를 메우라고 합니다. 나와 이웃 사이에 생각이 달라서, 입장이 달라서, 제대로 모르고 오해해서 감정의 골이 생겼다면 그것을 이해와 용서로 메우라는 겁니다. 누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입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게 있는만큼 부족한 부분도 있지요. 그러니 남의 부족함과 허물, 실수와 잘못을 비난하고 단죄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가주는 넓은 아량이 필요합니다. 또한 나와 ‘다른’ 이를 ‘틀리다’고 배척하지 말고 서로의 다름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며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산과 언덕들을 깎아 낮추라고 합니다.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 군림하고 싶은 욕망을, 나 자신을 멋져보이게, 있어보이게 꾸며 주목과 인정을 받고 싶은 교만을 경계하며, 늘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낮추라는 뜻입니다. 참 하느님이시면서도 사람이 되시어 자신을 낮추시고, 제자들 앞에서 종처럼 자신을 더 낮추시어 발까지 씻겨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여 사랑으로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종말의 날에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구원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굽은 데는 곧게 만들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마음 먹은대로 세상을 보는 법입니다. 내 마음이 고집과 편견, 시기와 질투로 굽어져 있으면 내 눈에 비친 모든 사람과 세상도 다 굽어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를 보고 ‘넌 왜 마음이 굽어있느냐’며 지적하기 전에,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굽어 있지는 않은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모습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안에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의 부족함과 약함, 실수와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들이 다른 이에게 피해나 상처를 입혔다면 ‘내가 잘못했다’며 먼저 손 내밀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넷째, 거친 길은 평탄하게 만들라고 합니다. 너와 나의 마음이 통할 길을 만드는 것은 ‘말’입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내 마음 내키는대로, 분노라는 감정에 휘둘려 거친 말들을 함부로 쏟아내지 말고,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질 지를 그의 입장 상황 마음을 충분히 헤아린 다음 조심하고 배려해가며 부드럽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상처를 주고 받을 일이 없습니다. 상대방을 내 안에 받아들여 사랑으로 참된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성탄과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가 해야 할 마음의 준비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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