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복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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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4-12-10 | 조회수58 | 추천수1 | 반대(1) 신고 |
오늘 복음 또한 잘 아시는 복음입니다. 오히려 간결한 내용의 복음이라 다른 각도에서 한번 접근해봤습니다.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하느님의 뜻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뜻하는 바는 비율로 보면 1프로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한 마리의 양도 보호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에서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만약 여러분이 목자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사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양을 치는 풍습과 관습을 이해해야만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비유입니다. 저는 오늘 이것도 무시하려고 합니다. 그것까지 언급하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그렇습니다. 한 마리의 양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뜻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 되겠습니까?
만약 그 한 마리쯤 잃으면 잃지 하는 식이라면 이건 인간 세상의 형법의 논리라면 그냥 미필적고의에 의한 살인입니다. 미필적 고의라는 표현은 뉴스에서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적극적으로 살인을 하려고 하는 고의는 없다고 해도 마음속으로는 그러한 결과가 발생한다고 해도 내가 의욕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일어나면 할 수 없지 하며 그 상태를 내심 받아들이겠다고 인용하는 상태의 고의를 말합니다. 이 논리로 본다면 살인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찾지 않으면 그 양은 굶어죽을 수 있고 다른 요인 때문에도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에도 애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주지 않아서 애가 죽게 된다면 부작위에 의한 유기치사죄가 성립합니다. 형법상 이런 형태를 부진정부작위범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그 결과가 행위를 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낼 때 사용하는 형법상 용어입니다.
만약 엄마가 기소돼 방어권으로써 난 단지 젖만 주지 않았다고 변론한다면 이게 설득력이 있을까요? 만약 다른 여인이 애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건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저는 세상 형법의 논리이지만 이 논리를 한번 생각해보면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목자도 있는 걸 저는 봤습니다. 정말 위험천만한 사고방식입니다. 분명 복음에도 이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아흔아홉마리 양이 나한테는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 마리 양은 포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목자가 포기를 하겠다는 이유가 아주 무서운 이유입니다. 바로 상대적인 비율입니다. 양입니다. 그와 같은 목자는 겉으로 보기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건 설득력이 없습니다. 만약 이런 경우라면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마리를 구하게 되면 아흔아홉 마리를 잃게 된다는 그런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경우라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하는 것과 같아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처럼 한 마리를 잃지 않는 게 하느님 뜻이라고 해서 무모하게 한 마리를 선택하려고 하는 목자가 있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목자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극단적인 비유를 들었지만 이런 걸 이해를 해야 우리가 함부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표현을 왜곡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사실 중의적인 함의가 포함된 면도 있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 드리기 위해 이런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한 명까지도 구원하는 게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씀은 그 한 명까지도 구원을 하고 싶은 게 하느님 마음이라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인간세상에도 자기 뜻대로 다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말이 하느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건 아닙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부정하는 말처럼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복음을 이런 관점에서 묵상하는 건 만약 우리 천주교에서도 이처럼 다수의 교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어떤 한 개인을 보호하는 것을 방임하는 목자가 있다면 그 목자가 이런 부분을 평소 생각해보지 않으면 그 목자가 한 그런 생각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가 되는지를 전혀 모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런 목자에게 한번 상기해 드리고 싶어서 이런 묵상을 해보게 된 것입니다. 제가 서두에 언급한 목자는 개신교 목자였습니다. 설마 천주교에서는 이런 목자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여라도 그런 생각을 하는 목자가 있다면 그런 목자는 분명 나중에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그런 목자가 단 한 분도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사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우리가 평소 표현하는 이 표현을 얼마나 잘못 사용하고 남발하는지 그것도 설명하고 싶었지만 약간은 언급했습니다만 언제 또 기회가 되면 이 표현이 얼마나 무서운 표현인지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는 표현입니다. 잘못 사용하면 마치 살인적인 무기와 같은 게 될 수 있습니다. 잘 사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모르고 잘못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 모르고 하는 말이라 크게는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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