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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2주간 수요일 : 예수님의 멍에는 왜 가벼운 것일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4-12-10 조회수52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멍에에 관한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냥 나에게 와서 뭔가를 배워라고도 하실 수 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인품, 여기서는 인품이라고 표현을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신성도 지니고 계신데 신성을 표현하는 적당한 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인성도 가지고 계신 분이라서 부득불 그렇게 표현하겠습니다.

 

먼저 온유하시고 겸손도 하시다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말 그대로 해석을 하면 이렇기 때문에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식도 누릴 수 있다고 하셨고 또한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또한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생각해서 복음의 내용만 봐서는 왜 그런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우리는 그렇다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우리의 상상과 묵상으로 나래를 펼쳐봐야 할 것입니다.

 

멍에는 목에 거는 막대입니다. 말과 소 따위의 동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걸 이해를 하려면 옛날 소림사 영화나 중국 영화를 보면 양쪽 어깨에 긴 막대를 걸쳐서 물동이를 메는 소림사 같은 걸 연상하면 이해가 한결 쉬울 것입니다. 만약 이 막대를 사용하지 않고 물동이를 들고 가려면 아주 힘든데 물론 같은 무게인데 막대를 이용해서 어깨를 지지해서 들고 가면 힘도 들 들고 또 이동도 용이하지 않겠습니까? 어깨의 힘이 양 다리의 힘이 지지를 해 주고 그 지지해 주는 힘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인체의 역학을 이용한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짐이라고 했지만 여기서 짐은 실제는 멍에에 부착된 것도 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것과 연결된 쟁기 같은 것도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쟁기를 끌기 위해서는 쟁기가 밭에 묻혀서 땅과 저항해서 받는 마찰력이 멍에에 전달되고 그 마찰력보다 끄는 힘이 더 커야 밭 같을 것을 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다 연상해서 한번 묵상을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할 때 표현하는 단어 중 하나가 멍에입니다. 이때 의미는 구속이라든지 속박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께 매이게 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면 좀 더 잘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사랑하는 여자랑 산행을 하는데 그 여자가 메고 있는 배낭 때문에 산행이 힘들다고 했을 때 남자가 그럴 경우 대신 멘다고 한번 가정을 해보죠. 남자라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경우에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대신 메고 가 주는 것과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 그 대상도 남자라고 한다면 가령 어쩔 수 없이 도와주어야 하는 도덕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렇게 한다면 양 사안에서 그 무게가 동일하다는 전제를 했을 때 그 상황이 어떨 것 같습니까? 그 외 다른 조건도 동일한 조건이라고 했을 때 말입니다.

 

설령 무겁고 힘들다고 해도 사랑하는 여자의 배낭을 메었을 때는 모르는 남자의 배낭을 메었을 때보다는 더 가볍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똑같은 무게인데도 왜 그럴까요? 그건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걸 감수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사랑의 힘이 그 무게를 인식할 수 없게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느낀다고 해도 심적으로는 덜 느끼게 됩니다. 이제 이 개념을 복음에 한번 대입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라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근데 그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도 함께 메고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저희를 사랑해서 지는 그 희생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제로는 우리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응당 우리가 지고 가야 할 그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저희를 사랑해서 지고 가시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우리의 십자가인 셈인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멍에가 되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벼운 멍에이고 저희를 사랑한다면 굳이 그 멍에를 메라고 하지 않고 그냥 예수님 홀로 가시면 될 일인데도 불구하고 왜 메라고 하셨는지를 생각해보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요? 우리에게 그 멍에가 구속의 멍에가 아니고 또 속박의 멍에가 아니고 그 멍에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과 온유, 희생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을 사랑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여자의 배낭을 멜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멜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한다면 오늘 복음이 좀 더 공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꺼이 그 멍에를 같이 메고 가고 싶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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