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은 진통제가 아니라 치료제를 주시는 분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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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12-11 | 조회수52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예수님은 진통제가 아니라 치료제를 주시는 분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1) 이 말씀에서 ‘안식’이라는 말은,
단순히 ‘편안하게 쉬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구원, 영원한 생명, 평화,
영원한 기쁨과 행복 등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라는 뜻입니다.
‘고생’과 ‘무거운 짐’은 ‘죄와 죽음’을 포함해서
인간을 짓누르는 모든 억압과 고통입니다.
‘너희’는 ‘모든 사람’입니다.
“나에게 오너라.” 라는 말씀과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당신을 믿고 당신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당신을 따르라는 권고입니다.
‘내 멍에, 내 짐’은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입니다.
이 표현은 ‘반어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멍에나 짐이 아니라,
온갖 멍에와 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너희의 멍에들과 짐들을 없애고
너희에게 해방과 안식을 준다.” 라는 뜻입니다.
2) ‘안식’(구원)을 얻기를 갈망하지만,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를 몰라서 방황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요한 4,13-18)”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5-26)”
여기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여자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일 수 있습니다.
‘참된 구원(안식)’을 얻기를 갈망하면서
이 종교, 저 종교를 찾아다니면서 방황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참된 구원’을 주시는 분을 만나지 못하면,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어떤 곳에서도 구원을 얻지 못하고,
안식과 평화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3)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여기서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라는 말은, “주님의 말씀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고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라는 뜻이고,
“주님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
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만을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이 고백은, 인간 세상에는 종교가 많지만, 우리가 믿는
하느님만이 참 하느님이시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만이
참 주님이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다른 종교의 신은 신이 아니고, 신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4) 세상에는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해 주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마음의 평화’가 ‘구원’(안식)은 아닙니다.
그것이 선한 일이고, 좋은 일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실제로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구원’은 ‘마음의(영혼의) 평화’를 얻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방식으로 얻는 ‘마음의 평화’는 진통제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진통제가 아니라 치료제이고,
그 치료제는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대림 제2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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