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대림 제2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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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12-12 | 조회수40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마태 11,11-15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정도나 상태가 고만고만한 것을 놓고 어느 것이 더 나으니, 이건 저것만 못하니 하며 다투는 모습을 두고 “도토리 키 재기”라고 합니다. 그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서로를 비교하며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겠지요. 우리 눈에 도토리가 그렇게 보인다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 모습이 그럴 겁니다. 자기가 남들보다 잘하는 게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부족한 이들을 도와줌으로써 함께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일진데, 그럴 생각은 안하고 자기를 드러내고 돋보일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런 우리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도 참 마음이 답답하실 듯 합니다.
물론 부족하고 약한 우리 모습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키를 재는’ 일은 필요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잘 하는 게 무엇이고 잘 못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약하며 어떤 부분을 채워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문제는 키를 재는 기준점을 어디로 잡는가 하는 것이지요. 세상은 키를 땅에서부터 재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곳이 바로 ‘땅’이라는 이름의 물질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은 키를 땅에서부터가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재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이가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정한 규칙에 따라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칙을 알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 대해 언급하시는 알쏭달쏭한 말씀이 지닌 뜻이 이해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은 ‘땅’, 즉 이 세상을 기준으로 하면 그 누구보다 영적으로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평가의 기준이 ‘하늘’로 바뀌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아직 세례자 요한이 죽기 전이었기에, 즉 그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전이었기에, 이미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참된 일치를 이루고 있는 ‘성인’(聖人)들을 비교 대상으로 하면 그들보다 영적으로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사람들을 회개시켜 예수님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게 한 그의 공로에 따라 ‘재평가’가 이루어지겠지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그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하느님 뜻에 철저히 순명했기 때문입니다. 그 겸손과 순명 덕분에 ‘하느님 나라’라는 복된 선물을 받아 누릴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 뜻을 따르기보다 내 뜻을 이뤄달라고 강요하고, 내 소원을 이뤄주시지 않으면 그분을 믿지 않겠다는 협박의 말을 습관처럼 입에 담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억지로 뺏으려 드는 이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이들만이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으며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나라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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