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토요일 복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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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4-12-14 | 조회수41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오늘 복음도 몇 줄 안 되는 짧은 복음입니다. 오늘은 복음을 바탕으로 해서 좀 다른 각도로 복음을 묵상했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씀을 가지고 오늘 복음 전체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평가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가를 했는데 그 평가가 나중에 시간이 흐른 후에 잘못 평가를 했다고 자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비록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인품이라든지 어떤 성격과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좀처럼 드물긴 하지만 말입니다. 처음에 사람이라는 건 평가가 어렵다고 한 이유는 속담에도 있지 않습니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모른다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전에 표현한 사람도 사람인데 왜 그런 사람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건 뭔가 보이지 않는 그 사람만의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아우라 같은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아우라라고 하니 모순형용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우라라는 것은 보여야 그게 아우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아우라라는 이 표현을 잘 보셔야 합니다. 이건 이렇게 표현을 해보고 싶습니다. 실제 어떤 사람은 그 사람만의 광채와 같은 아우라가 나오지만 그걸 보는 사람이 실제는 그 아우라가 존재하지만 그 아우라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좀 쉽게 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을 하겠습니다. 아우라가 없는 사람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고 아우라가 나오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실제는 아우라가 나와서 대단한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이 그 아우라를 보지 못해서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알게 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왜 그땐 그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지 못했을까요? 이유야 다양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걸 알 수 있는 안목이 좁다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나라를 4강의 기적을 일으킨 히딩크 감독에 관한 자료를 보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 시절에는 크게 빛을 발하지는 못했는데 감독으로서는 위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운이라고도 치부할 수도 있을 수 있지만 히딩크 감독이 뛰어난 감독으로서의 자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어떤 선수를 발굴할 때 남들이 보지 못하는 면을 본다는 게 특징입니다. 다른 점도 뛰어난 점이 많겠지만 히딩크 감독은 그러한 능력이 뛰어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을 감안해서 저는 이런 걸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신앙 공동체에서 우리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내용을 언급하지만 우리도 이처럼 세례자 요한처럼 위대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교회 내에서 요한처럼 마치 예언자는 아니지만 예언자 역할을 하며 선구자적인 그런 의식과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있어도 그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200년 전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이런 사례가 많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교회는 이전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젠 성소자도 많이 감소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저는 이런 것도 문제지만 만약 이런 게 문제가 돼 나중에 현실적으로 어떤 문제가 될지는 그때 가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와는 별도로 설령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그런 문제에 대한 다른 보강책을 교회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제 나름대로 생각한 게 있습니다. 오늘 제가 서두에 언급한 내용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중에서도 물론 신분은 평신도이지만 뛰어난 인재가 있다면 평신도의 신분이지만 성직자의 역할은 할 수 없어도 그와 같은 위치에서 성직자 역할을 보조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미래의 우리 교회의 앞날을 생각해보면 이런 것도 충분히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성직자 역할은 하지 못해도 그런 인재를 발굴해 인재를 양성하게 되면 반드시 우리가 생각하는 성소자 부족 때문에 생길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나마 문제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제가 듣기로는 제주교구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제가 하는 말씀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제주교구에는 선교사가 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반교리교사보다 좀 더 실력이 있는 그런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제주교구와 같은 현실이 앞으로 장차 우리 천주교 내에서도 머지않아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한국천주교도 이런 면을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때 가서 사후약방문을 찾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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