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판관13,2~7.24~25)
"그리고 아기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된다.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다." (5)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된다'
'면도칼'로 번역된 '우모라'(umorah)는 접속사 '와우'(wau)와 '면도칼'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 '모라'(morah)가 결합된 것이다. '대어서는'으로 번역된 '야알레'(yaalleh)는 '올라가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얄라'(alla)의 미완료형이다.
직역하면, '그리고 면도칼이 (그의 머리 위에)올라가게 하지 말라'이다.
히브리어 문법에서 금지 명령은 동사의 미완료형에 부정어 '로'(lo)나 '알'(al)을 사용하여 표현하는데, '로'(lo)를 사용하면 '절대적이고 영원한 금지'를 나타내는 반면에 '알'(al)을 사용하면 '일시적인 금지'를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미완료형에 '계속적인 금지'를 나타내는 부정어 '로'(lo)를 사용하여 표현하였으므로 머리에 면도칼이 올라가는 것, 곧 머리카락 자르는 것을 그의 평생동안 계속적으로 금지하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삼손은 필리스티아 제후들의 금전 공세에 넘어간 들릴라에게 자신의 비밀을 누설함으로써 머리털을 밀리우게 되고(판관16,17-19), 결국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 만다.
'모태에서부터'
'모태'로 번역된 '합바텐'(habbaten)은 정관사 '하'(ha)와 '자궁','배'라는 뜻을 가진 '뻬텐'(beten)이 결합된 형태이다. 그리고 '~에서부터'로 번역된 '민'(min)은 '~으로부터'(from)이라는 출발 지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 태로부터'라는 의미이다.
새 성경은 출산 순간의 뉘앙스를 주지만, 원문 성경의 표현은 여인의 자궁에서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삼손은 자궁 안에서의 수정 순간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마노아의 아내는 삼손을 임신하는 순간부터 나지르인 자녀를 잉태한 어머니로서 그녀 자신의 몸을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구약에서 '뻬텐'(beten)은 인간의 생명이 생성되는 시초를 가리키는데, 하느님께서는 자궁에서 생명이 잉태하는 순간부터 그 생명을 보호하시고 감독하는 분이심을(시편71,6; 이사49,1) 묘사하는 데 사용된 단어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문은 탄생 이전에 생명이 생성되는 장소에서부터 하느님께서는 그 아이를 나지르인으로 인정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생명이 전적으로 하느님께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며 또한 태어난 이후의 나지르인으로서의 삶도 온전히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마노아의 아내는 생명을 잉태한 그 순간부터 주님의 사자가 명하는 모든 규정들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어떤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나지르인으로 서원하면 서원한 봉헌 기간 내내 머리를 깎을 수 없었다(민수6,5). 다시금 일반인의 신분으로 돌아갔을 때 머리를 깎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삼손이나 사무엘처럼(1사무1,11) 출생이전부터 나지르인으로 구별된 자는
일평생 동안 머리털을 밀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죽을 때까지 '영원한 나지르인'으로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이 될 것이다'로 번역된 '키'(ki)는 앞 문장에 대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 ~이기 때문이다' 라는 의미이다.
태어날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서는 안될 이유는 바로 그 아이가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기 때문이다.
한편 '나지르인'으로 번역된 '네지르'(nezir)는 '구별하다','바치다', '거룩하게 하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 '나자르'(nazar)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성별된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원어의 의미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나지르인'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하기로 특별한 서원을 한 사람이다.
따라서 특별히 하느님께 봉헌한 나지르인에게는 그 삶 가운데 보통 사람과는 구별된 그 무엇이 요구되었고, 나지르인에게 주어진 이러한 규정은 율법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민수6,1-21).
이러한 나지르인의 규정은 구원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 대전에 이방인과 구별되는 계약 백성의 규정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로마12,1.2).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 아버지 대전에 온전한 봉헌으로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기능도 가진다.
한편 나지르인은 유기(有期)와 종신(終身) 두 종류가 있다.
실제적으로 구약에 기록된 종신 나지르인은 삼손과 사무엘 뿐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종신 나지르인이 된 자들이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삼손의 경우는 하느님께서 친히 나지르인으로 바칠 것을 지시하였던 반면(판관13,5.7), 사무엘의 경우는 부모가 자식을 나지르인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였다는(1사무1,11)점에서 차이점을 지닌다.
또한 이 둘 중에서 사무엘은 평생을 나지르인으로 살아 세상과 구별되어 하느님께 충성으로 헌신했지만, 삼손은 정결치 못한 세속적인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하느님께 생명까지 봉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다'
'구원해 내기' 라고 번역한 '레호쉬아'(lehoshia)는 '~를 하여', '~하는 것을' 이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레'(le)와 '구원받다', '구출되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야샤'(yascha)의 사역형 부정사 연계형 '호쉬야'(hoschia)가 결합된 형태로서 '구원하는 것을'이라는 의미이다.
동사 '야샤'(yascha)는 구약의 군사적, 정치적인 측면에서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신약의 영적인 측면에 이르기까지 구세사의 맥을 형성하는 의미를 가진 대단히 중요한 단어이다.
구약에서의 고통은 주로 군사적, 정치적, 개인적인 적대자와 자연적인 재해들로부터 왔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 가운데서 구원받는다(야샤)는 것은 고통받는 자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이외의 다른 외부의 힘의 도움을 받아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모든 고통의 현장으로부터 인간을 온전히 구원해 주시는 이는 궁극적으로 주님 한 분 뿐이시다.
이와 같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향한 외적이며 육체적인 구원이 신약에서는 영적인 구원의 개념으로 발전 확대되는데, 주로 죄의 용서 및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로마8,1-2; 에페2,4-5).
본문이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삼손의 탄생 자체가 필리스티아로부터 완전한 구원을 가져와 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시작과 단초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
즉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의 압제로부터 완전히 구원받는 것은 삼손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삼손 이후에도 필리스티아인은 여전히 아스라엘을 괴롭혀왔으며, 사울과 다윗 왕이 그들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큰 기여를 했지만(1사무14,1~46; 2사무5,25; 8,1) 그들이 앗시리아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기 전까지는 필리스티아의 세력이 이스라엘로부터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