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2월 1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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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12-19 | 조회수4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12월 19일] 루카 1,5-25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대림 시기 후반부의 전례 독서와 복음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시는 과정에 협력하며 참여한 여러 인물들을 우리에게 소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고자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또한 오시는 구세주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맞아들여야 하는지를 묵상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로 하여금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이끌었던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얽힌 비화입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 보시기에 의로운 이들로써, 그분께서 알려주신 계명과 규정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며 사는 거룩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의 나이가 되도록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엘리사벳이 육체적으로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충실한 그들의 청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셨고, 당신께서 계획하신 ‘때’가 되자 가브리엘 천사를 즈카르야에게 보내시어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얻게 해주시겠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즈카르야는 자신이 간절히 청했던 소망을 이루어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도 기뻐하지 못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인간적 한계가 먼저 보였기 때문입니다. 본인도 아내 엘리사벳도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늙어버렸는데, 그 늦은 나이에 아들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 의심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간절히 기도하며 노력했음에도 아들을 얻지 못했던 실패 체험들이 그의 마음 속에 ‘나는 안된다’는 부정적 인식으로 각인되어 버린 탓이지요.
그릇은 비어 있어야만 그 안에 소중한 것을 담을 수 있는 법입니다. 인간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마음이 가득 찬 상태로는 하느님의 은총을 제대로 담을 수도, 그 은총이 열매 맺게 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엘리사벳이 출산할 때까지 즈카르야의 입을 닫아버리십니다. 침묵 중에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돌아보고 회개함으로써 마음 속에 담긴 부정적인 것들을 비워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고 난 뒤에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 담아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즈카르야의 마음이 의심과 불신이라는 속박에서 자유로워져 하느님을 온전히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의 탄생이 그들에게 하느님 자비와 구원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즈카르야라는 이름에는 “하느님께서 기억해주셨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이름에는 “하느님께서 맹세하셨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 하느님께서 그들의 아픈 처지를 기억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토록 하느님께 충실했던 그들의 노력을 기억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그들의 청을 들어주시겠다고, 그들이 바랐던대로 아들을 얻게 해 주시겠다고 직접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큰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며 그분의 약속을 굳게 믿고 따랐으면 될 일입니다. 그랬다면 감히 하느님의 뜻을 의심했다는 죄책감 없이,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의 탄생을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에 담긴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다”는 진리를 목청껏 외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받은 소명을 되새겨봐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며 그분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충실히 실천하며 기쁘게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온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소명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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