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겸손, 순종, 섬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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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 작성일2024-12-22 | 조회수111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2024.12.22. 대림 제4주일
미카5,1-4ㄱ 히브10,5-10 루카1,39-45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겸손, 순종, 섬김”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 모든 이가 갈망하는 이여, 두벽을 맞붙이는 모퉁이돌이시니,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인간을 구원하소서.”
대림 제2부, 오늘 12월22일의 애절한 "오후렴"입니다. "마라나타!" 예수님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우리 인간을 구해달라는 간원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바로 우리의 길잡이가, 인도자가 되는 분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되시는 분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두가 되시는 분입니다. 도대체 예수님 아니고는 누구를, 무엇을 이 자리에 놓을 수 있을런지요?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라"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평생 우리 삶은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따라야 할 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제가 다음과 같이 자주 즐겨 고백하는 분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어제 뜻밖의 책 선물도 각별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빠는 아니지만 “아빠! 아버지!”(로마8,15)라 부르는 하느님을 닮은 수도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꼭 읽어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 5분, 아빠 목소리” 란 책 제목에, ‘태교 동화를 읽는 시간, 지혜를 배우는 아이’ 였고, 이어 ‘마음과 생각이 함께 자라는 이야기, 나답게 크는 이야기, 세상을 꿈으로 채우는 이야기’ 세부분의 제목도 아름다웠습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탄생 전 요셉의 태몽, 마리아의 태몽,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아름다운 만남이 태중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태교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었겠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옛 어른이 지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바닥으로 내려갔을 때, 그 사람의 바탕이 드러난다.”<다산> “날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더디 시듦을 알게 된다.”<논어>
예수님의 진면목은, 바탕은 바로 사랑임을, 소나무, 잣나무잎처럼 끝까지 남아있는 독야청청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겸손과 순종, 섬김의 사랑으로 요약되는 예수님의 본모습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보고 배워야 할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 그리고 섬김의 사랑입니다.
첫째, 사랑의 겸손입니다. 사랑의 표현이 겸손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천명하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예시되는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그 아득한 옛날 미카 예언서의 말씀이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탄생할, 동시에 모시고 살고 있는 예수님의 묘사같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올라간다....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외관상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탄생지 베들레헴이 상징하는바, 예수님의 “작음, 겸손, 온유, 착함, 평화”입니다. 험하고 거친 광야와 같은 세상,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운 덕목들인지요! 이래서 "우리의 착한 목자 겸손한 예수님"이라,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존재자체가 겸손이신 분, 평화이신 분, 바로 예수님입니다.
둘째, 사랑의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순종의 모범입니다. 사랑의 자발적 순종입니다. 사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일에 순종함이 생활화될 때 마지막 순종의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도 가능합니다. 참영성의 표지가 순종이요, 예수님은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순종의 여정은 그대로 비움의 여정이 됩니다. 모전자전, 그대로 "예스맨"이신 마리아 어머니의 순종을 닮았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도 이를 입증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어머니 마리아의 고백을 닮았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이루러 세상에 왔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순종의 삶, 그대로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 진리에 순종합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순종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명명했던 성 아우구스티노, “진리의 협력자”라 명명했던 베네딕도 16세 교황도 생각납니다. 심지어 불교의 대선사 고 성철스님도 “진리에 몸바치는 삶”이 당신의 좌우명이라 했습니다.
셋째, 사랑의 섬김입니다. 섬김 역시 참 영성의 표지입니다. 우리에게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뿐이요,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하나뿐입니다. 예수님 역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설파하셨습니다. 고 이형우 아빠스의 모토도 “서로 섬기자(Serviamus invicem)”였고 "나는 공동체의 심부름꾼"이라 고백했던 취임식때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공동체를 섬기는 심부름꾼이 바로 장상입니다.
오늘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 어머니의 모습이 심상치 않습니다. 나이 적은 분이 연장자를 찾아가는 것이 예의이기도 하지만 주님의 어머니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함축합니다. 바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모범을 보여 주시듯 태중의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을 찾아 가신 것이지요!
성모님을 통해 태중의 예수님의 섬김의 사랑에 감격한 엘리사벳이요, 즐거워 뛰노는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입니다. 엘리사벳의 성령충만한 기쁨과 감격의 고백은 늘 들어도 참신합니다. 사랑의 표현이자 믿음의 표현이 바로 섬김입니다. 섬김은 바로 사랑의 척도요 믿음의 척도가 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모전자전, 성모 마리아의 믿음의 순종과 섬김을 고스란히 닮은 예수님이요, 오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태중의 예수님은 물론 요한에게도 참 좋은 태교가 됐을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 모습은 겸손과 순종, 섬김으로 요약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주님의 길을 잘 준비하도록 합시다. 바로 겸손과 순종, 섬김의 삶에 정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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