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탄생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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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 작성일2024-12-23 | 조회수105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2024.12.23. 12월23일
말라3,1-4.23-24 루카1,57-66
세례자 요한의 탄생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아이들>
“오 임마누엘 우리의 임금이시오, 입법자이시며 만민이 갈망하는 이요 구속자이시니,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하느님!”
오늘은 12월23일 마지막 "오후렴" 역시 장엄하고 감동적입니다. 예나 이제나 구세주 예수님 오심을 갈망하는 인류의 염원은 여전합니다. 특히 요즘의 혼란한 시국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모두가 길을, 빛을 찾습니다. 궁극의 길이자 빛은 우리를 찾아 오시는 구세주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예수님 탄생 하시어 오실 날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4개의 영롱하게 타오르는 대림촛불이 예수님 오심이 임박했음을 알립니다.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도 우리의 감수성을 늘 새로이 할 것을, 늘 대림의 희망과 기쁨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모든 것은 세월이 지나면 때가 타고 닳게 된다. 사람의 마음도 잘못 길을 들이면 헐거워지고 바스라진다.”<다산> “사람들이 선량한 마음을 놓아버려 마치 도끼로 나무를 베는 것 같으니, 날마다 베어버리면 어찌 아름답겠는가.”<맹자> 선물같은 일상을 소중히 여겨 한결같은 새로움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세월 흘러 몸은 노쇠해가도 신망애(信望愛)만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탄생에 앞서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일화를 보여줍니다. 요즘 계속되는 미사중 독서들이 예수님 탄생에 앞서 하느님의 만반의 준비과정을 보여줍니다. 우연적 탄생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섭리 과정의 참 좋은 선물이 아이의 탄생임을 보여줍니다. 하나하나 그 고유의 사명을 지닌 귀한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한 아이의 탄생은 온 마을의 축제요 기쁨이 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탄생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예전 어렸을 적 아이를 낳은 집 대문앞에 숯과 고추가 달린 금줄을 달아 놓았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20대 젊은 시절 존경했던 개신교 저명한 세계적 민중 신학자 안병무 박사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당신이 어머니가 되어 한 번 아기를 갖고 낳는 체험을 하고 싶다는 고백이며 임신한 분의 특별 허락을 얻어 불룩한 배를 만져보며 생명의 신비에 감동했다는 고백의 내용이 50여년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지난 47차 코르시카 해외 사목 여정후 귀국시 기내에서 대동한 67명 언론인들과 짧은 인터뷰 대목의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너희들은 여기서 많은 아이들을 보았느냐? 이곳은 아이들을 가진 땅이다. 앞서의 방문지인 동티모르 와 여기서, 나는 아이들을 가진 이들을 보는 것이 참 행복했다. 이것이 미래다(This is the the future)!”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과 함께 걷는 모습에 감동했음이 분명합니다. 요즘은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걷는 모습을 보기가 참 힘든 세상입니다.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두 분은 우리의 영원한 현재이자 미래임을 깨닫습니다. 칼린 지브란의 ‘아이들에 대하여’란 글중 한대목이 생각납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 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들인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을 소중히 키워야 함을 배웁니다. 교황님이 늘 사랑하며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아이들입니다. 더불어 어린시절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를 참으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함을 깨닫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듯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이미 아득한 옛날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예고 되어 있고,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가 엘리야의 재림임을 믿었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보라, 내가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구약성서 맨마지막 말라기서의 맨끝부분에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사명이 예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니 예사로울 수가 없습니다. 작명과정에서 하느님의 개입이 드러납니다. 아기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자 즉각적인 아기 어머니 엘리사벳의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반발하자, 이웃과 친척들은 잠시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의 반응을 묻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판에 씁니다. 참고로 요한은 "주님은 자비로우시다"를 뜻합니다.
그러자 즈카르야는 즉시 혀가 풀려 말을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 유명한 즈카르야 찬미가는 내일 복음에 소개될 것입니다. 온마을의 기쁨이자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기쁨이 된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마지막 유다의 온 산악지방 주민들의 심정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는 다음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은 손길은 요한뿐 아니라 여전히 우리도 돌보고 계십니다. 요한 대신 나를 넣어, “대체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물으며 화두로 지니고 살아야 할 말마디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나와 더불어 이웃 형제자매를 귀히 아끼고 돌보고 살피며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시편25,4-5ㄱㄴ).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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