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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메시아입니다.>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12-24 조회수67 추천수4 반대(0) 신고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4-14)”

1) 여기서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라는 말은, 방을 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관에 투숙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베들레헴 주민들

가운데에도 산모를 위해서 방을 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이 없어서’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물론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출산에 대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했을

것이고, 여관비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온 사람들이 여관방을 모두 차지했고,

아무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아무도 반기지 않는

차가운 세상으로 오신 것이고, 그때부터 이미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요한복음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그 상황에 대해서 혹시라도, “만일에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요셉과 마리아를 위해서

나의 방을, 아니, 나의 집 전체를 내주었을 것이다.”

라고 큰소리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큰소리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다음 말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41-4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지금 내 곁에 있는 ‘작은 이’가 바로 예수님이고,

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입니다.

2)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배척만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맞아들여서, 비록 방은 아니고 외양간이었지만,

어떻든 출산을 위한 장소를 내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마도 8절에 나오는

‘목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에 그 지역의 외양간은 주로 동굴이었는데,

외양간 역할도 하고, 목자들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의 숙소를 요셉과 마리아에게

기꺼이 내주고, 자기들은 들에서 노숙을 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누워 계셨던 ‘구유’는 우리나라 외양간의

여물통과는 다르고, 양을 먹이는 건초를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에 아기를 눕히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를 몰랐고,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인줄도 몰랐지만, 그들은 메시아를 맞아들인

‘마음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이 말에서 ‘손님’은 요셉과 마리아처럼 딱한 상황에 처해

있는 나그네를 뜻하고, ‘천사들’은 하느님을 뜻합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딱한 처지에 놓인 성가정을 접대하다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 하느님’을 접대한 의인들입니다.

3)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라는 말은,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8-29).”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워 계셨다는 것은,

인간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음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 즉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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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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