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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12-25 조회수40 추천수4 반대(0) 신고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5.9-14).”

1)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이 믿음이 없는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이거나 이단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복음서 저자의 신앙고백으로 시작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마무리되는 책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18절에서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라고 말하는데, 이 말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말은 ‘하느님이신 그분’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요한 14,8-9)”

2) 혹시라도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냥 하느님을 잘 믿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우리 구원에 직결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날입니다.

옛날의 위대한 예언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그런데 하느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탄절은 바로 지금 이곳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신 날이고, 우리가 성탄절을 경축하는

것은 그 하느님께서 ‘나에게 오심’을 경축하는 것입니다.>

3)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말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라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4-15.17).”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굳이 사람이

되지 않으셔도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로

내려오신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내려가 주는 것.”이고,

또 “사랑이란, 같아지는 것”입니다.>

4) 만일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내려오신 것으로 끝났다면,

그것은 그냥 허무하게 끝나버린 일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려오신 다음에는 다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를 데리고 올라가기 위해서...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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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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