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활묵상 : 신앙에도 헌법이 있다고 한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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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4-12-26 | 조회수40 | 추천수1 | 반대(3) 신고 |
요즘 우리나라에서 방송이나 신문, 아니면 국민들 사이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단어가 아마도 ‘헌법’이라는 단어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저는 만약 신앙에 있어서 이걸 대입해 본다면 그게 무엇일까 하고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예전에 한번 제가 헌법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세상에서 헌법이라는 것은 최상위 법입니다. 저 세대는 이것을 초등학교 4학년 사회 책에서 배웠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그것도 잘 모르면서 그냥 무조건 외웠던 것입니다. 헌법, 법률, 명령, 조례, 규칙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것이지만 다른 건 몰라도 명령과 규칙은 사실 어려운 내용인데 이게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 이게 있었다는 게 조금은 놀랍기도 합니다. 국회가 입법기관으로서 법률을 제정을 해도 그 근본 정신은 헌법을 벗어나면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헌법이라는 것은 모든 법의 모법과도 같습니다. 어머니 법이라는 의미입니다. 요즘 간혹 방송이나 유튜브나 방송에서 헌법학자가 나와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헌법은 다른 법률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문이 많지 않습니다. 단순히 국가의 조직 설계도와 같은 것도 있지만 그 설계도를 바탕으로 해서 그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정신을 법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 우리 종교에서 헌법이라는 것은 없습니다만 만약 우리도 계명이라는 것과 율법이 있기 때문에 한번 적용해 보면 과연 그게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로 그건 ‘사랑의 이중계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이중계명도 신명기에서 그 근원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생각해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게 어떻게 마치 세상 법에서 헌법과 같은 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단순히 그 단어의 액면적인 뜻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짧은 조문을 가진 헌법의 법서를 보면 천 페이지 이상되는 책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법조문 하나에 대해 그 조문의 의미와 그 단어를 마치 국어사전의 단어 뜻풀이 같은 형식의 해설이 아니고 추상적이지만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법이란 개념의 옷을 입혀서 설명을 하고 그걸 다양하게 어떻게 적용하는지 그 일례를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책 내용이 방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해석한다면 가령 하느님 사랑 하나만 놓고 본다고 해도 하느님 사랑이 어떤가를 설명하면서 그 사랑의 속성을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가 가지를 내고 또 가지를 내고 해서 그게 좀 더 다르게 표현되고 풀이된 게 성경 말씀도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제가 앞전에 포도밭 비유에 대한 생활묵상을 올렸습니다만 이것도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의 자비’가 되겠지만 세상 법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논리로 보면 불공평하겠지만 ‘계약의 자유의 원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계약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늦게 온 포도밭 일꾼이 한 데나리온을 받아갔다고 해서 먼저 온 일꾼이 자기가 맺은 계약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법익을 침해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없지만 조국 전 대표가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권이라는 게 지금 실정법에서 있다면 이건 사회권이라는 개념의 시각으로 본다면 포도밭 비유가 아주 명쾌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제 한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오늘 제가 이런 걸 한번 공유를 해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건 사실 말로 보면 일반 평신도에게만 해당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있지만 자세히 보면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이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그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가 다 해당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세상과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봉쇄수도원이라고 해서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고 살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비건한 예로 카르투시오 수도원 같은 그런 봉쇄수도원도 프랑스나 다른 전세계 수도원과 서로 연락을 취하고 하기 위해서 인터넷이 연결돼 있습니다. 하느님 세상을 꿈꾸며 그런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도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도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살아가다보면 그것도 다양한 사람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 문제가 안 생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나 아니면 교회법이 있다면 그 교회법을 적용한다든지 이렇게도 해결할 수도 있고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이건 단순한 예입니다. 설령 이렇게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다 이렇게 해결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저는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해결의 실마리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면 바로 ‘사랑의 이중계명’ 이 단순한 계명에서 답을 찾고 그 정신에서 지혜를 구하게 되면 아마 해결되지 않을 문제점이 거의 없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세상사도 마찬가지이지만 신앙 안에서 문제도 자기의 입장에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 생각하다 보니 마찰과 갈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역지사지의 관점으로 보면 문제가 설령 있다고 해도 그 문제는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역지사지라는 것도 다르게 표현하면 바로 사랑입니다. 최종 결론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신앙의 눈으로 신앙을 바라보게 된다면 좀 더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신앙공동체도 신앙생활이 풍요롭지 않을까 하는 묵상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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