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영근 신부님_“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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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12-29 | 조회수58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오늘의 말씀(12/29)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 제1독서 : 집회 3,2-6. 12-14 * 제2독서 : 콜로 3, 12-21 * 복음 : 루카 2, 41-52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 <오늘의 강론>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거룩한 탄생은 하느님께서 ‘가정’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가정’을 만드시며(이루시며)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엮어지고 꾸며졌기 때문입니다. 곧 ‘성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루시며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첫 장소로 ‘가정’을 이루셨습니다. 이초록, 당신의 오심으로 모든 것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당신께서는 맨 먼저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가정’이란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무대임을 깨우쳐줍니다. 곧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무대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정의 주인이 되시도록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곧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집회 3,6)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신앙공동체 구성원의 신분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곧 하느님의 호의를 입은 자요, 하느님의 사랑을 입어 선택받은 자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삶으로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용서, 사랑, 평화, 감사로 제시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서 풍부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 3,16)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시고, “이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콜로 3,20)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바로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준재임을 말하면서도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명하고 지냈다.”(루카 2,51)고 전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연상시킵니다. 곧 ‘친교와 사랑과 통교를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를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성가정’은 모든 ‘가정’뿐만 아니라 모든 ‘수도공동체’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가정’이라고 해서,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가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으며,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불우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도 없어서 성가정이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가정’이란 단순히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거나 말썽 부리는 사람이 없는 가정이라서가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실뿐만 아니라 주인이 되어 계시는 가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을 이루는 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머무실 수 있도록 하는 일’이요, ‘그 말씀이 품은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일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성가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구원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가는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머무르게 하되, “말씀”이 주인으로 머무르게 할뿐만 아니라, ‘주인이신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순명과 섬김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순명으로 섬기고, 섬김으로 순명하며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정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과 평화가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동행하시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주님! 눈을 뜨고도 당신을 보지 못함은 당신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바다 안에서 바다를 찾아다니는 우둔함을 멈추게 하소서. 찾는 것을 멈추고,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이곳이 아버지의 집임을! 춤추는 춤꾼과 춤이 분리되지 않듯, 제 안에서 저와 분리되지 않으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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