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영근 신부님_“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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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12-31 | 조회수41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 오늘의 말씀(12/31) :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 제1독서 : 1요한 2,18-21 * 복음 : 요한 1, 1-18
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 <오늘의 강론> 오늘은 “성탄 8부 내 7일”이며, 2024년을 마감하는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다보며, 오늘을 가져다 준 지난날들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보낼 수 없었던 한해를 보냈습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를 통해서는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복음>을 통해서는 ‘한 처음의 날’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한 처음’의 놀라운 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여기서, “사람”은 직역하면 ‘살을 취하였다’는 것으로 약함 안으로 들어온 것을 말하고, “사셨다”는 것은 ‘천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거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이 오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어 오셨고, 사람이 되시어 오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과 ‘그분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고 함께 거주하고 사신다.’는 믿음은 초기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교리가 되었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가 인용한 초대교회의 찬미가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이는 단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을 하느님 되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하신 일인 것입니다.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엄청난 사랑’을 말해줍니다. 교부들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까닭은 인간이 하느님 되기 위함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변모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변모’와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변모’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신을 ‘비우는’ 일이 있고, 그와 ‘같아지는’ 일이 있고, ‘하나 되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본받는’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심도 깊은 신비적 차원을 일이 벌어집니다. 곧 베드로가 표현한대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2,4) 되는 일이 있고, 바오로가 표현한대로 “그분의 형상을 지니고”(1코린 15,49), “그리스도를 입고”(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 “같은 모습이 되는”(로마 8,29)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타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비워주고 내어주어, 그로 하여금 당신께서 누리는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함께 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타자가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리를 그에게 내어주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자신이 그의 자리로 들어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어주는 것은 곧 들어가는 일이 됩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고 나아가 상대에게 들어가기에, 동시에 자신의 그 빈자리에 그를 받아들이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상대를 취하고 상대를 받아들여 상대와 같아지고,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 전통에서 전해져 오는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직 같아지는 것만이 구원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비우는’ 행위의 종착지는 ‘같아지는’ 것이요,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것은 또 다시 당신에게로의 변형을 가져옵니다. 곧 이러한 변화는 변화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또 다른 차원의 변화로 끌고 갑니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같아짐’을 통해 우리와 자리를 바꾸는 지점까지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본질 자체로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은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이를 “놀라운 교환”(admirabile commercium)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이 되는” 길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바로 그 길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곧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그저 자기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님’ 안에 머물면, 하느님께서 그 안에 들어와 ‘전부’가 되실 것입니다. 아멘.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주님!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제 발길이 당신을 향하여 있는지, 제 마음에는 당신의 평화가 들어와 있는지를 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미 제 안에 생명의 빛을 불어넣으셨으니 이제는 죽음의 어둠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제가 당신 생명으로 새로워지고, 세상에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온 세상이 생명의 빛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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