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땅에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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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5-01-01 | 조회수15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루카 2,16-21).”
1)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예수님은 황제의 집안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시골의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황궁의 침대가 아니라 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셨던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를 나타내는 표징, 또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나타내는 ‘표징’이 됩니다. “메시아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표징.
2) 그리고 천사 군대가 나타나서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첫 번째로 들었던 목자들, 바로 그 사람들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즉 충실하고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소식’만 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두 가지 선물도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과 ‘평화’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4.17-18).” 그리스도 예수님은 참 평화의 원천이신 분이고,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이고, 참 평화를 누리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그 평화가 어떤 평화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최소한의 자기 방어력도 없는, 너무나도 연약하기만 한 갓난아기, 그러나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 그 모습 자체가 평화입니다.
4)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사야서의 예언이 연상됩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 11,6-9).” 이 예언을 간단하게 줄이면, “메시아의 나라는 약육강식도 없고, 적자생존도 없는, 오직 사랑만 있는 나라이다.”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고, 그 나라에는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고, 증오심도 없고 적개심도 없습니다.
5)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리려면 우리 쪽에서도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야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평화를 빼앗아가는 죄들에서 벗어나려면 회개해야 하고, 이기심과 미움과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언제나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도 함께 살아야 합니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높은 장벽을 쌓아 놓고서, 또 감시 카메라와 경보 장치들을 잔뜩 설치해 놓고서, 그 안에 숨어서 혼자서 살면, 몸은 ‘안전’할 수 있겠지만, ‘영혼의 평화’는 없습니다. 사랑 없이는 평화도 없습니다. 두려움만 있습니다. 바로 그 두려움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6ㄴ-18).”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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