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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선행과 기도로 은총의 삶을 / 연중 제7주간 목요일(마르 9,41-50)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18:56 조회수15 추천수0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선행과 기도로 은총의 삶을 / 연중 제7주간 목요일(마르 9,41-50)

 

아프리카서 원숭이 잡는 법이다. 그가 좋아하는 먹이를 나무 구멍에 넣는다. 그러면 원숭이는 거기에 손 넣고 먹이를 꽉 움켜쥔다. 먹이를 쥔 순간 그는 구멍에서 주먹을 뺄 수 없다나. 먹이를 포기하면 되는데도, 끝내 그걸 움켜쥐고는 결국 잡힌다. 참 어리석지 않은가? 그런데 이 원숭이가 어쩜 우리와 닮은 것 같다.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집착 등으로 영원한 생명을 놓치는 건 아닌지? 그렇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꽉 잡은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아야 할 게다. 썩어 없어질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게 예수님 가르침이다.

 

나를 믿는 이 단하나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손이 죄지으면 잘라라. 두 손으로 지옥 불에 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을 얻는 것이 낫다. 발이 죄지으면 잘라라. 두 발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 얻는 게 낫다. 또 눈이 죄지으면 빼버려라. 두 눈으로 지옥 가느니, 외눈으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낫다. 지옥에서는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불 소금에 절여지리라.”

 

참 냉정하고 가혹하다. 남 죄짓게 하는 이에게 닥칠 걸 예수님께서는 딱 잘라서 경고하시기에. 가장 소중한 손과 발, 눈이 죄짓게 하면 가차 없이 버리라는 예수님 말씀은, 아예 죄 지을 생각조차 말라는 훈계다. 우리도 간혹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더 좋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유혹에 빠졌을 때 겪을 고통을, 미리 알고 계셨나 보다.

 

그렇지만 우리 몸은 하느님으로부터 부모를 통해 받았으니, 머리카락 하나라도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게 맞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마치 우리 몸을 난도질이라도 하듯, 손이나 발이 죄 지으면 잘라 버리고, 눈마저도 빼 버리라신다. 그분의 이 말씀은 너무 냉정하고 가혹하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당연히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우리네 이 몸을, 소중히 여기셨음에 틀림없을 게다.

 

그런데도 왜 이런 무시무시할 정도의 몸서리치는 단호한 말씀을 굳이 하시는지? 사실 우리네 몸 세포 하나하나가 때로는 나쁜 기억들을 품고 있어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유혹하고 있단다. 이 때문에 손발 잘라 내는 아픔을 감수하듯 단호하게 죄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육체의 노예가 된다나.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에 대해 이런 냉정하고 엄격한 생각을 가지셨다.

 

이는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기고, 하느님을 모르는 게 더 자유롭다고 말하는 냉소적인 이들에게는 대단한 경종이다. 재산 모으기만 하고 나누지 못한 이들이 말년에 겪는 자녀들 재산 다툼, 평생 돈 모으느라 건강 잃어 삶의 기쁨도 잊은 채 병원비로 재산을 몽땅 날리는 이들, 망나니로 키운 자녀들 뒤치다꺼리로 재산을 탕진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 경고다. 때로는 이런 훈계가 실감나지 않을 수도. 다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야 뒤늦게 깨닫는 우리이기에. 나만 잘살겠다고 평생 남을 외면하면, 훗날 하느님 마주 뵐 때 무슨 말씀 드릴 것인지 생각해 볼 때다.

 

죄 짓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언뜻 보면 위압감만 자아낸다. 그렇지만 그대로의 해석은 매우 위험하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완벽한 게 아닌 부족한 이들이기에, 죄 짓지 않고 산다는 건 참 어렵다. 그러기에 성령의 이끄심으로 살아야만 한다. 속죄의 정신으로 인내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려면 선행과 성사 생활에 충실하자. 은총만이 죄의 유혹 피할 테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선행,기도,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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