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주님께서 ‘나를’ 믿어 주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
---|---|---|---|---|
작성자최원석
![]() ![]() |
작성일2025-03-31 | 조회수31 | 추천수4 |
반대(0)
![]() |
“이틀 뒤에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요한 4,43-54).”
1) 이 이야기는 앞의 2장 23절-25절에 연결됩니다.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요한 2,23-25).”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에 대해서만 열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사람들과 비슷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요한 6,15).
2)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라는 말을 좀 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믿어 주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믿음’에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음을 예수님께서 믿어 주신다는 확신도 포함됩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그쳐도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믿어 주실까?”를 스스로 끊임없이 묻고, 반성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를 믿어 주실 수 있도록 제대로,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 왕실 관리에게 하신 말씀,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표징과 이적만 바라지 말고 먼저 나를 믿어라.”, 또는 “나를 믿지 않으면서 왜 나에게 표징과 이적을 바라느냐?” 라는 뜻입니다. 그 왕실 관리는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오긴 했는데, 아직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시기를 기대하긴 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하는 상태입니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아들을 고쳐 주면 그때 가서 믿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4) 그 왕실 관리의 간청과 어떤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마태 8,10).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왕실 관리의 믿음을 그 백인대장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5) 49절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라는 왕실 관리의 말 앞에 “믿겠습니다.” 라는 말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의 아버지가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외치면서 예수님께 간청한 일이 있는데(마르 9,24), 왕실 관리의 심정도 그 아버지의 심정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을 믿고 떠나간 것은, 믿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사실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항상 ‘표징’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53절의 “믿게 되었다.” 라는 말은, “확신하게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사순 제4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