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5주일 다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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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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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06 | 조회수39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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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다해] 요한 8,1-11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한 해가 마무리되어 가는 12월이 되면 전국의 대학 교수들이 설문을 통해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합니다. 한 해 동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여러 현상들 중에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사건 혹은 경향을 네 글자의 한자로 표현해보는 것이지요.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는 “아시타비”(我是他非)가 그 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되었었습니다. 이는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뜻으로 ‘내로남불’이라는 말을 한자로 옮긴 신조어입니다.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 없이 타인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여 비난하고 단죄하는 이들이 많아진 우리 모습을 풍자한 겁니다. 그런데 그런 풍조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생각과 논리, 행동방식을 ‘표준’으로 정하고 다른 이에게 그것을 따를 것을 강요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연결을 위해 만든 창구인 “SNS”상에서, 자신의 편협하고 주관적인 잣대로 다른 이를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며, 비난과 단죄의 돌을 던지는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연스레 그 돌에 맞아 고통받고 피 흘리는 이들도 너무나 많지요. 당사자의 입장이나 상황은 들을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비난 받아 마땅한 잘못을 저질렀으니 내가 심판의 돌을 던져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알고 있을까요? 언젠가는 자기 자신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죄인’이, 무시무시한 돌팔매질을 당하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다른 이에게 심판과 단죄의 돌을 던지려는 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는 그분께 이렇게 질문하지요.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당시 율법에 따르면 약혼한 여인이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을 경우 그녀의 친정 동네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도록 정해져 있었는데, 그에 대한 예수님의 의견을 물은 겁니다. 만약 율법에 따라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면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는 당신 말씀을 번복하시는 게 됩니다. 또한 당신께서 공생활 내내 강조하셨던 용서와 자비의 가르침을 스스로 어긴 ‘위선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게 되겠지요. 그렇다고 그 여인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면 유다인들이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수님 스스로도 그것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공언하셨던 율법을 어기게 됩니다.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난처하고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기 어려운 일종의 ‘외통수’인 셈입니다. 그 질문을 던진 이들은 아마 속으로 쾌재를 불렀겠지요.
하지만 그런 뻔한 수에 걸려드실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즉시 답을 하시는 대신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본 군중들은 아마 적잖이 당황했을 겁니다. 갑자기 왜 그런 행동을 하시는지, 대체 땅바닥에 뭐라고 쓰시는건지 궁금하여 예수님을 쳐다봤겠지요. 그런 점은 오늘 복음 내용을 접한 성경 주석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땅바닥에 쓰신 내용이 무엇인지를 헤아려보기 위해 그분 가르침에 비추어 유추해보고 거기에 본인의 영적 상상력을 더하여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땅바닥에 쓰신 내용보다는 그분의 행동 자체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행동을 하신 것은 죄 지은 여인에 대한 분노에, 어서 그 죄인을 심판하고 단죄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군중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 여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했으며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유 없는 분노에, 왜곡된 정의감에 휩쓸려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할 시간을 주시려는 겁니다. 그 상황에서 한 걸음 멀어져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다보면, 그 여인에게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성찰하게 되고, 그런 객관적 자기 성찰을 통해 비난과 단죄에만 매몰되지 않고 이해와 용서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에게 그런 성찰과 통회의 시간을 갖게 하신 뒤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녀의 잘못을 무조건 덮어주거나 합리화하자는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기 전에 내 눈에 들보가 박히지는 않았는지를 돌아보자는 것이지요. 내 눈에 탐욕과 교만, 영적 해이와 자기합리화라는 죄의 들보가 박힌 채로는 다른 사람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는 당연히 올바르게 식별하거나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잘못된 오해와 섣부른 판단으로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사이에 자신은 올바르고 의롭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점점 더 깊은 죄의 수렁에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에 돌을 들고 씩씩대는 우리에게 “너나 잘 하세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그 자리를 떠나갔다는 기록이 흥미롭습니다.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지은 죄가 많아서일 수도 있고, 오랜 시간 연륜과 지혜가 쌓이다보니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에 대한 성찰이 깊어져서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죄에서 돌아서서 회개할 수 있는 힘은 성찰의 깊이에 비례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깊이 성찰하는 사람이 먼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회개한 사람이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먼저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 손에 쥔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비난과 단죄의 현장을 먼저 떠난 사람일수록 더 행복합니다.
모두가 떠나간 뒤에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그 말씀은 그 여인이 지은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들어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은, 그녀가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녀가 지은 잘못에 따라 즉시 그녀를 단죄하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녀가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는 겁니다. 즉 ‘무죄선고’가 아니라 일종의 ‘집행 유예’인 셈이지요. 그렇기에 그녀에게는 지금부터가, 앞으로 살아갈 삶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가거라.” 갑자기 어디로 가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 힌트가 오늘의 독서 말씀들 안에 숨어 있습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8)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필리 3,13)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들 힘은 없어도, 지금부터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살기 위해 노력할 힘은 있습니다. 그러니 과거의 부족함과 잘못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드리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자신이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주신 희망찬 미래를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되는 겁니다. 그 한 걸음은 지금 내가 여기에서 하느님 뜻을 충실히 살아감으로써 내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다시는 죄 짓지 마라”는 말씀은 또 죄를 지으면 그 땐 정말 큰 벌을 내리겠다는 엄포가 아니라, 죄 많은 여인이 회개의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어 드리고 자기의 전재산이나 다름 없는 비싼 향유를 그분 발에 발라드렸듯이, 내가 주님의 은총과 자비를 입은 존재임을, 회개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삶과 행동으로 드러내라는 권고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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