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세상사 다 그분 뜻이려니 하고 믿다보면 / 사순 제5주간 화요일(요한 8,21-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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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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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07 | 조회수26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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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세상사 다 그분 뜻이려니 하고 믿다보면 / 사순 제5주간 화요일(요한 8,21-30)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믿으면서 희망을 가져야 하는가?’ 어느 철학자는 우리의 물음은 이 세 가지로 귀착된단다. 가끔씩 우리도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나.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있기에.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당신께서 하실 일을 분명히 아셨기에 그분 아들로서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그분께서 이 땅에 이루실 그 나라를 위해 의당 참여해야만 하리라. 이를 위해 어떤 거창한 계획이 필요 없다. 더 나은 가정과 이웃, 세상을 향해 그저 작은 벽돌 한 장 쌓는 심정으로 사는 거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작은 일이지만 그분 마음에 드는 일하며 사는 것일 게다. 작은 것 같지만, 지금 우리 삶에 그 답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린 뒤에야 당신의 정체성을 알 수가 있다나. 이는 하느님에게서 오시어 그분께로 되돌아가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이것은 우리 안에 넘치는 생명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주어지니까. 이 주님 수난과 부활의 신비는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연다. 우리가 육신의 죽음만을 두려워한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 진정한 삶과 죽음은 언제나 자신의 삶에서 결정되니까. 이곳의 삶에서 다가올 부활의 삶을 모른다면 저곳의 더 멋진 부활의 기쁨을 정녕 맛보지 못하게 될 것이니까. 이렇게 어떤 관점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리라. 세속에 사는 우리도 이 부활의 기쁨을 알지 못하면 당연히 저 곳의 삶도 모를게다. 그래서 그들 역시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동문서답만 한다.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그러면서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다. 기적까지도 사탄의 사주를 받은 일로 치부한다. 그러하니 무슨 말인들 지식으로 보려하니 제대로 들릴 리가. 그렇게 그토록 기다려 왔던 예수님인데도 몰라만 보니. 아무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총도 함께하지 않으리라. 우리 역시 삶에 일어나는 무수히 반복되는 기적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숨 쉬는 것 자체가 기적 아니냐? 이 기적 보도록 하는 게 믿음이다. 이 눈으로 바라만보면 숱한 기적들이 지금도 우리 곁의 도처에 있음을 보리라. 받아들이면 기적은 기적 그 모습으로 깨달아지니까. 그러면 유다인들이 그토록 배척하였던 그 예수님의 참 모습도 보일 게다. 그분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던 그들이지만, 믿는다면 다 그게 우리에게는 기적으로 드러나리라. 믿지 않으면 의심이 끼어든다. 옆에 기적 두고도 근심이다. 참 안타깝다. 그분마저도 안타까워하신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못 믿겠다는 것도 어쩜 당연한 일일 게다. 그래서 모르는 것을 보는 게 믿음이라 했던가! 믿을 만한 것을 믿는 것은 누구나 다 한다. 확실한 증거를 갖다 들이대면 믿지 못할 이가 별로 없다. 하지만 물증 없이도 믿는 게 결코 쉬운 건 아니리라. 그러기에 물증을 앞세워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닌, 그냥 믿는 거다. 어렸을 때에 막무가내 부모님 말씀에 순종했듯이 그렇게 받아들이며 믿는다. 우리 먼 앞날마저도 그렇게 맡기면서 믿어보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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