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활묵상 : 혜성처럼 나타난 한 자매님의 묵상글을 보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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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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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09 | 조회수57 | 추천수1 |
반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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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일로 굿뉴스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분이 계셔서 그분 글만 잠시 봤습니다. 묵상을 시의 형식으로 작성하셨더군요. 이분의 묵상글을 보면서 새로운 묵상을 해봤습니다. 제가 처음에 영세를 받고 영세를 주신 신부님이 항상 강론 말미에 매번은 아니지만 자주 언급하시는 클로징 멘트가 있습니다. 바로 "묵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멘트였습니다. 그땐 사실 그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시는지는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개신교에서 하는 큐티라고 하는 것과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비슷하지만 내용면에서는 달라서 어떻게 하는 게 진정한 묵상인지 말입니다. 개신교 다닐 때는 신앙서적을 읽어도 성경적인 이야기에 신학적인 내용을 가미해 스토리 형식으로 전개한 책을 보면서 하느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때는 그 방법만으로도 말씀에 대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개종 후 천주교에서 나온 영성 서적을 줄기차게 탐독했습니다. 아마 일반 신자가 보면 신앙을 어떤 지식으로 습득할 거냐고 하시면서 의문을 제기할 분도 계시겠지만 제가 그렇게 한 이유는 우리는 개신교에 비하면 개신교 설교랑 비교했을 때 일단 시간 분량면에서 차이가 많이 나고 설령 깊이는 있다고 한다해도 양적인 면에서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말씀에 몰입해 말씀 속에서 은총의 여운이 오래가지 못하는 게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그리고 지금까지 거의 강론을 들어봐도 성경의 일부 사실만 언급을 하시지 그것도 그날 복음 정도, 그것마저도 어떤 경우는 아예 언급도 안 하시는 강론도 부지기수입니다. 실제 예비신자 때나 아니면 어떤 신부님은 우리가 미사 때 미사 참례 전 미리 독서와 복음을 읽고서 묵상한 후 미사 때 독서와 복음을 들어야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하셔서 그렇게 해야 하는 걸 알고 그렇게 했는데, 실상 어떤 경우는 보면 그렇게 준비를 하고 가도 전혀 독서와 복음을 미리 보고 간 게 별 의미가 없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개신교와 비교해서 보면 말씀으로 은혜를 받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물론 개신교 목사님의 설교도 성경 말씀을 좀 더 현실적으로 이해를 시키기 위해 세상의 지식을 인용해 성경 말씀과 연계해서 그 성경 말씀이 더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도록 하긴 합니다. 우리도 어느 부분은 그렇게 하긴 하는데 우리는 보면 전체를 다 평가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제가 들은 강론만 보면 대개 성경 말씀에 비중이 덜한 건 사실입니다. 그렇다 보니 현실적으로 개종 후에 말씀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 반감이 되다 보니 차선책으로 영성서적을 통해 보충하려고 영성서적을 많이 읽게 됐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 10년 정도 하면서 깨달았다고 하긴 좀 그렇고 느낀 게 있었습니다. 약간 이율배반적인 모습 같지만 깊은 묵상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건 이 분야에 유명한 신학자 신부님의 논문에서도 제가 확인한 사실입니다. 음식도 재료가 많아야 다양한 레시피를 통해 다양한 음식 맛을 낼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묵상이라는 게 그냥 단순히 생각만 하는 게 묵상이라고 초신자 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묵상은 그 말씀이 자신의 영혼 안으로 스며들 수 있게끔 마치 말씀이 우리가 먹은 음식이 분해 소화되어 영양분만 흡수하듯이 그렇게 영양분 흡수 과정 그 자체가 되기 위한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 과정이 묵상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근데 우리는 묵상을 잘못 이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야구해설처럼 야구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는 그 경기 모습을 실황중계하는 것처럼 묘사를 하는 걸 묵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런 게 묵상인 줄 알았습니다. 그건 성경해설이지 묵상이 아닌 걸 알았습니다. 만약 이게 성경해설로만 그치지 않으려면 저도 처음엔 어떤 경우엔 성경해설처럼 묵상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경우가 부득불 필요한 경우에는 할 수 있겠지만 가능하면 설령 그렇게 했다고 해도 최종 마지막에는 그게 해설이라는 선입견을 가지지 않으려면 그 해설을 바탕으로 해서 어떤 성경 내용의 액기스라고 할 수 있는 결과물을 도출시킨다면 그건 묵상을 하기 위한 필요한 사전 절차로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그냥 단순한 성경해설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가까운 이웃 본당에서 새벽미사에 참례했습니다. 그날 신부님의 강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신부님에 대해 제가 간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공개를 하고 싶지만 그건 그 신부님께 한편 좋은 일일 수도 있지만 허락을 받지 않고 올린다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부담으로 작용하실 수 있기 때문에 언급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 강론은 전 본당에서 작년에 손님 신부님으로 오셔서 들어봤고 그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웃 본당에 부임하셔서 여러 차례 들었는데 그분 강론은 들을 때도 뭔가 생각을 하게 하는 여운을 주시기도 하지만 미사를 마치고 성전을 나간 후 집으로 가면서도 제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그 신부님의 강론이 처음부터 거의 다시 복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제가 머리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신부님께서 그날 복음의 말씀을 마치 성경해설처럼 판에 박힌 해설의 형식으로 했다면 그런 설명은 이미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성전을 나오면 그 순간 그냥 머리에서 떠나버립니다.
이건 뇌과학 이론에도 나오지만 우리의 뇌는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 늘 똑같이 인식하는 건 이미 뇌에서부터 신선한 충격을 주지 못 하기 때문에 인식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흥미를 끌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흥미를 끌기 위해서는 같은 내용이라도 레시피를 달리 해야 합니다. 두부 요리도 조림을 할 수 있고 아니면 단순히 굽고 간장 양념만 넣어 조리할 수 있듯이 같은 두부라는 재료를 사용하지만 레시피가 다르면 음식맛도 다르듯이 묵상도 그렇습니다. 이때 이 레시피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다양한 지식도 역할을 할 수 있지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때 발상의 전환은 남들이 보지 않는 면을 보는 것입니다. 그 면을 보려면 그냥 단순히 봐서는 절대 볼 수 없습니다. 꼼꼼히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할 정도로 면밀히 봐야 합니다. 먼저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지식과 선입견에서도 벗어나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번 어떤 주제에 대해 그 복음을 묵상했다면 전에 묵상한 내용과 같을 경우 그 사람의 묵상의 깊이는 그 수준이 한계입니다.
가령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돌아온 탕자의 복음을 누군가는 1년 전에 묵상했을 때 작은 아들에 대해 묵상한 내용의 글과 1년 후 묵상한 글의 내용이 상반된다고 했을 때 이 사람이 1년 전에 한 묵상과 1년 후 묵상의 결과가 다르다고 해서 뭔가 일관된 묵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의 변화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복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서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묵상이라는 건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이제 정리를 하겠습니다. 요즘 새로 등장하는 서하 자매님의 시로 된 묵상을 보면서 묵상이라는 게 과연 어떤 게 진정한 묵상인지를 여실히 그 실체를 알려주시는 것 같고 앞에 '돌'이라는 주제로 쓰신 묵상시는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는 묵상글이었습니다. 이런 게 진정한 묵상글입니다. 이건 정말 묵상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글입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 신부님 강론이 바로 여운을 줄 수 있고 집에 가면서도 그 내용이 복기가 되는 이유는 내용 그 자체에 깊은 고뇌의 흔적이 묻어 있는 묵상이어서도 그렇지만 논리 전개 구성도 논리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은 진정한 묵상글은 어떤 글인지를 한 자매님의 묵상글을 통해서 묵상을 해봤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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