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5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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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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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11 | 조회수59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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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금요일] 요한 10,31-42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합니다. 흔히 ‘투석형’이라 부르는 이 형벌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행해지던 것이었습니다. 대체 예수님이 무슨 잘못을 하셨길래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요? 그 핵심 죄목은 ‘신성모독’죄입니다. 예수라는 자가 비천한 인간인 주제에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하여 그분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생각했기에, 하느님을 대신해서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심판하려고 든 겁니다. 물론 그런 사고방식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그들은 나름대로 하느님을 향한 자신의 충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함부로 대하고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자기 일처럼 생각했기에 도저히 두고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봅시다. 진짜 ‘신성모독’의 죄를 저지른 이는 누구일까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며 따른 예수님일까요? 아니면 심판과 단죄라는, 철저히 하느님께만 유보된 고유권한을 자기 것처럼 함부로 휘두른 유다인들일까요?
그런 점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시기에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성경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하느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맡기고 파견하신 당신이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게 왜 신성모독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라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신’은 법관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에 따라 재판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그 법관들을 ‘신들’ 곧 ‘하느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저 하느님께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했을 뿐인 이들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행동과 삶으로 실천한 예수님을 그렇게 부르는 게 왜 문제가 될까요? 오히려 그 이상의 칭호로 불러드려야 마땅하지 않겠는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신원은 부족한 인간의 눈으로 본다고 해서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게 아니니 상관없다고, 다만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에 철저히 순명하며 그분 뜻에 맞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건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살펴본다면, 확증편향에 물들지 않은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것이니 그것만은 왜곡하지 말아달라고 말이지요. 그래야 예수님의 삶과 행동을 본받고 따를 것이고, 그런 온전한 따름을 통해서만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여 그분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 받은 그 사랑을 나도 실천하면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된 사람은 그분의 사랑과 선함을 닮아 하느님이 되지요. 이를 가리켜 신학용어로 ‘신화’라고 부르는데, 이는 우리가 불충으로 여기며 배척해야 할 ‘죄’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할 ‘덕’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여 하느님이 되어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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