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활묵상 : 고해성사 꾸준히 봐야 하는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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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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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14 | 조회수97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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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주일 저녁미사 전에 아마 사순 시기 마지막 성사일 것 같습니다.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계속 성사를 봤습니다. 제 앞에 한 자매님이 대기하셨습니다. 볼려고 본 건 아닌데 어쩌다가 얼굴을 보게 됐습니다. 한 번 보고 또 봤습니다. 왜 봤을까요? 미인이라서 봤을까요? 그 정도의 미모면 미인이라고 해도 지나친 건 아닐 겁니다. 저는 그래서 본 게 아닙니다. 얼굴이 순진무구한 아이 같은 얼굴이라 봤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한 생각입니다. 저렇게 맑고 청아한 자매님도 뭔 죄를 지었다고 성사를 보기 위해 대기하고 있으신지 의아했습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자매님과 저를 외관상 비교하면 저는 죄를 많이 지은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그 자매님이 상대적으로 제가 보기엔 영혼이 맑아보였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집에 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까 그 자매님의 영혼은 왜 맑은 하늘처럼 청아하다고 느껴졌을까? 이걸 계속 묵상했습니다. 정답은 모르지만 아마도 계속 성사를 보통의 평균적인 사람보다는 더 자주 봤을 거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가 그분이 얼마나 자주 보시는지는 잘 모릅니다. 근데 제가 몇 년 간 보면 평소에 자주 성사를 보는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10년 넘게 보면서 판공 때만 성사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판공 때만 보는 분도 정말 죄를 짓지 않아서 필수적으로 봐야 해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는 대개 희박할 겁니다. 실제 죄를 지어도 이게 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 안 하실 수도 있고요 또 죄가 된다고 해도 이게 성사를 볼 만큼 큰 중대한 죄 즉, 대죄가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때 그 정도는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 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너무 세심하게 우리의 생활 자체를 죄라는 틀 안에 엄격히 재단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죄라는 것에 대해 관대하게 해석하는 것도 금물일 것입니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그래도 나약한 인간이라 죄를 짓지만 자기가 지은 죄를 드러내고 계속 죄에 물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영혼과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영혼은 분명 당장에는 그 차이를 느낄 수 없을 겁니다. 그건 나중에 언젠가 우리가 현세에서 생을 마감하고 하느님께 돌아갈 때쯤엔 그 노력이 드러날 것입니다. 어떻게 드러날까요? 그 마지막 얼굴이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공부를 성실히 꾸준히 열심히 한 학생이 대체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건 진리입니다. 꼭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입니다. 마치 영혼도 그럴 겁니다.
이 세상에는 단숨에 어떤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잘 없습니다. 하나 하나 단계를 밟아야 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영혼에 나쁜 오물 같은 게 묻어 있으면 묻을 때마다 털어내야 할 겁니다. 이게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는 수북하게 쌓여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혼탁하면 탁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성사를 의도적으로 형식적으로 자주 볼 필요는 없지만 그간 경험에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불과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취약한 죄가 있습니다. 그 죄를 언젠가는 굴복시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그 죄에 넘어질 때마다 계속 성사를 보면 그 죄가 언젠가는 자기도 모르게 극복이 되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체험을 해야 이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몇 년이 걸려도 계속 성사를 보는 게 조건입니다. 그럼 그런 노력을 하게 되면 어느 시점에서 인간이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걸 체험할 때가 있을 겁니다. 힘을 주신다는 것이지 하느님이 전적으로 그 죄를 물리쳐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힘으로 자기가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저의 생생한 체험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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