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활묵상 : 맑은 영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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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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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15 | 조회수73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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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봉 주교님의 선종 소식을 이재명 대표 기사를 읽다가 금요일 밤 자정쯤에 두봉 주교님을 문상했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검색해 알았습니다. 굿뉴스를 그 전에 잠시 들어왔는데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몰랐습니다. 저는 사실 두봉 주교님에 대해 방송으로 뵙고 그분에 대해 알았는데 어느 날 유시민 작가가 두봉 주교님을 언급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작가이다보니 글 관련해서 언급하실 때 주교님을 언급하셔서 그때 그분에 대해 많은 자료를 검색해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런 후에 실제 카르투시오 수도원에서 두 번 뵈었고 그때 수도원 식구들과 토론을 하면서 뵌 게 전부였습니다. 대충 약력을 보니 96세에 선종하셨는데 불과 그때 뵈었을 때가 이미 아흔이 넘은 연세였던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글에서 제가 언급했습니다.
한 연로하신 자매님의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시간이 지나면 그 어떤 누구도 젊을 때만큼 탄력이 있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 연세이면 피부는 노화로 인해 약간 주름이 가 있긴 하시지만 주교님의 영혼만큼은 맑아보였습니다. 방송으로만 봐도 그런 모습을 그분의 말씀과 어떤 행동에서도 그걸 공감하실 텐데요 실제로 뵈면 그걸 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언급했습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 수도자님들의 눈은 실제 인간 육신의 눈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 눈빛만큼은 사람의 눈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는 이런 느낌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수도원 내에 미사를 할 때 거양성체를 하실 때 신부님 손에 있는 성체를 바라보는 그 눈빛을 보면 마치 동공이 유리처럼 투과되어 반사가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 적도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때 독방에서 많은 생각을 하며 묵상했습니다. 근 24시간 하느님만 생각하시는데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4시간이라고 하니 과장된 이야기라고 하실 겁니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과장된 표현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설령 잠을 잔다고 해도 그냥 잠을 자는 게 아닌 것입니다. 이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샤를 드 푸코 신부님의 '사하라의 불꽃'이라는 영성서적을 읽어보고 또 옛날 은수자들이 남긴 말씀 어록을 보고 묵상하면 이게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이해가 될 겁니다.
저는 그때 주교님은 실제 카르투시안은 아니셨지만 주교님의 눈빛에서도 그와 같은 눈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눈빛 사이로 나오는 동심 같은 게 있었습니다. 그런 맑은 영혼은 그런 영혼이 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은 확실하다고 확신합니다. 그럼 어떻게 사셔야 그런 맑은 영혼을 소유할 수 있을까를 주교님 외에 다른 분들을 보면서도 묵상해봤습니다. 정확한 답은 아니지만 제가 카르투시오 수도원 수도자분들과 함께 지내면서 느낀 확실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기도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건 다 끊어버리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제가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들은 기도를 그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분들은 기도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여정에서 하나의 도구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 도구는 하느님께 가는 방향을 이끌어 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도구를 이용해서 하느님을 더 잘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니 조금은 추상적일 수 있을 겁니다. 단적으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짧은 기간 체험한 바에 의하면 제가 수도원에서 느낀 걸로 표현하자면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계산적인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이 계산은 단순히 이해타산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속된 표현이지만 이게 가장 정확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얕은 생각 같은 걸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잔꾀 같은 신앙으로는 절대 맑은 영혼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냉철하게 따지고 분석하면 상당히 계산을 많이 합니다. 이 계산은 이해타산 계산 뿐만 아니고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냉정하게 따지면 이런 관계로는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는 절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이런 관계에서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평행선을 이루기 때문에 수학적으로도 만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거리가 가까워도 그렇습니다. 마치 교도소 내에 죄수랑 면회자 사이에 있는 좁은 경계를 사이에 두고 있어도 접촉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실제 하느님이 우리 곁에 계셔도 우리와 하느님과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만날 수 없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 엄청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거리를 좁히는 데 기도도 중요하긴 하지만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장벽을 허물어야만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의 영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맑은 영혼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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