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주간 수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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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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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15 | 조회수144 | 추천수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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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는 정난주 마리아의 묘가 있습니다. 그녀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고난과 역경의 원인은 ‘천주교에 대한 믿음’입니다. 정난주 집안은 18세기 후반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초창기 천주교 신앙을 이끌던 쟁쟁한 인재들을 배출한 명문가였습니다. 정난주의 어머니는 한국 천주교 신앙의 성조(聖祖)로 꼽히는 이벽의 누이였습니다. 아버지 정약현의 세 동생, 그러니까 정난주의 숙부가 바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입니다. 숙부들은 모두 뛰어난 학문으로 유명했지만, 천주교 신앙도 받아들였기에 나중에 신유박해 때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야 했고, 정약종은 순교자가 되어 오늘날 가톨릭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또 고모부 이승훈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로 역시 신유박해 때 순교했습니다. 숙부 정약종의 세 자녀, 즉 정난주의 사촌들인 정철상 정정혜 정하상도 모두 순교했습니다. 이처럼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꼽히는 집안이었으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죄로 대거 순교하거나 유배형을 받아 풍비박산의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난주는 18살에 자신보다 두 살 아래인 황사영과 혼인하게 됩니다. 황사영은 16세에 초시,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대왕으로부터 칭찬과 학비를 받은 촉망받는 인재였습니다. 그러나 황사영은 이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현세적 명리에 등을 돌렸습니다. 그가 보장된 출셋길 대신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처 정난주와 함께 자연스럽게 일가친척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황사영 정난주 부부는 혼인 10년째 되던 해인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습니다. 정조대왕이 죽고 어린 순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곧 천주교 박해가 뒤따랐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이른바 '황사영의 백서(帛書)'를 썼습니다. 배론의 산속 굴에 은신하면서 비단에다 깨알 같은 글씨로 호소문을 작성한 것입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의 천주교 탄압 실상을 폭로하고, 외국군대를 이용해 조선 정부를 타격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백서는 결국 북경으로 발송되기 직전에 발각돼 피비린내 나는 탄압으로 이어졌습니다.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체포돼 그해 11월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정난주와 두 살배기 아들은 제주도와 추자도로, 시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각각 귀양을 가야 했습니다. 제주로 유배 가던 길, 호송선이 추자도에 머물렀습니다. 정난주는 이 틈을 타 두 살배기 어린 아들 경한을 저고리에 싸서 바닷가 갯바위 위에 놓고 생이별을 합니다. 아기의 옷섶에 황경한이라는 이름을 써두었습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며 저는 성모 마리아가 생각났습니다. 성모님도 당신 아들을 자신의 눈앞에서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어찌 보면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고통 속에서 끝까지 하느님의 뜻을 믿고 함께 걸어가신 분입니다. 정난주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자식과 이별하고, 남편을 잃고, 이름조차 지워진 땅에서 끝까지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그녀를 잊었을지 몰라도, 하느님은 그녀를 기억하셨고, 그녀의 믿음은 신앙의 유산이 되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주간에 주님의 고통과 사랑을 묵상합니다. 그 고통은 단지 육체적인 고난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내어주는 고통, 다 주고도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외로움, 그리고 섬김을 받지 않고도 끝까지 섬기는 헌신의 고통입니다. 정난주 마리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제주도의 외딴 유배지에서, 그녀는 원망하지 않았고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성모 마리아 역시 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지켜보며,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봉헌하였습니다. 정난주 마리아와 성모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섬김’으로 보여준 삶을 살았습니다. 그 삶은 마치 예수님의 길과도 같습니다. 마리아의 삶은 예수님의 이 길을 한 여인이, 조용히, 그러나 굳건히 걸어간 증거입니다. 오늘 영송체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우리도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가족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때로는 눈물 나도록 힘들지만, 사랑으로, 믿음으로, 끝까지 섬기는 사람, 주님의 길을 따르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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