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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을 수도 없이 배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부활로 나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5-04-15 조회수42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부분 중에서 지금은 나를 따라 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알기로는 바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성인의 순교를 미리 암시한 말씀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처럼은 죽을 수 없다고 해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 성인은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이 말에 예수님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신할 거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배신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배반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오늘은 여기서는 이 부분은 생략하고 다른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배신과 배반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을 단순히 모른다고 하는 부인을 배반, 배신이라고 생각을 하시는지요? 

 

만약 이런 액면적인 뜻만을 놓고 해석한다고 하면저는 수도 없이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물론 복음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그런 부인은 복음에서와 같은 상황이 연출이 되지 않았기에 없었지만 이런 것만이 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지만 아주 짧은 시간 혹시라도 만약 하느님을 계실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파스칼 도박이론에 나오는 것처럼 만약 하느님이 죽어서 안 계신다고 하면 하는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건 부정을 해서 그런 게 아니고 이때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래 실제 죽어서 보니 하느님이 만약 안 계신다고 했을 때 그때 지상에서 하느님을 믿고 산 삶을 후회를 할 것인가 아니면 후회를 하지 않을 것인가를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후회를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설령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해도 후회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떠나서 그래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가능하면 바르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후회를 할 수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포기를 해야만 했던 게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희생 아닌 희생도 해야 했고 또 억울한 것도 있어도 참아야 했던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하느님 말씀대로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했기 때문에 나쁜 길로 가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단순히 믿는다고 말로 어떤 신앙고백을 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긴 하지만 진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이런 신앙고백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한번 하느님께 마음을 줬으면 그 마음이 변치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편한할 땐 잘 찾고 어려울 땐 어렵다고 외면하면 그런 믿음으로 하느님을 믿게 된다면 그 믿음이 과연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자문을 해본다면 많은 사람이 부끄러울 것입니다. 저는 정말 고개를 들 수가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령 지금까지는 하느님을 믿는 데에 있어서 부족하거나 아주 부끄러운 부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부끄러움을 역으로 반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 어쩌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바로 그걸 미리 보여주신 분이 계십니다. 베드로 성인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성인이 배신을 할 것도 알고 계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 뒤를 따라 순교로서 나를 나중에는 따를 것도 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나약한 베드로 성인을 결국 예수님과 같은 순교의 길을 걷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길을 그렇게 갈 수 있었던 요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자기가 실언을 했지만 그 실언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실언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런 길을 갈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져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성인은 세 번의 실언으로도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베드로 성인보다는 더 많은 부인을 했을 겁니다. 말로 부인하는 것만이 부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부인입니다. 마치 양다리 걸치기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베드로 성인처럼 반전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예수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계실 겁니다. 그 길을 가는 과정이 바로 회개와 보속, 절제, 극기로 새로운 몸을 입는 부활의 여정일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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