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사랑은 ‘함께 있음’이고, 나를 전부 다 내주는 일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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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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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17 | 조회수63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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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만찬 때의 일이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13,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2-15)”
1) 성목요일에,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일을 기념하고, ‘발 씻는 예식’을 거행하고, 철야 성체조배를 합니다. 이 일들은 모두,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하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주신 일이고, 빵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로 결합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받아먹음으로써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먹게 되고, 예수님과 실제로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때가 수난 직전 최후의 만찬 때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 부활, 승천으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시지만, 즉 떠나신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보이지 않음’은 ‘떠남’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있음’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 이야기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0-31).” 두 제자는 예수님이 갑자기 안 보이게 되었는데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또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도 않습니다. 두 제자는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고(루카 24,33),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언합니다(루카 24,35). <두 제자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2)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어린 자녀들을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나는 부모가 마지막으로 자녀들을 먹이고 씻기는 것 같은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시고, 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을 것입니다.>
3)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은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4-27)” 다른 때도 아니고 하필이면 최후의 만찬 때에, 사도들이 누가 가장 높으냐는 문제로 말다툼을 벌였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인데,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시면서, ‘낮춤’과 ‘섬김’을 더욱더 강하게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말씀만으로’가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대로 따라 하라는 ‘명령’입니다.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섬기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4) 성목요일의 철야 성체조배는,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마태 26,40; 마르 14,37)”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위해서, 또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음’입니다.> ‘한 시간’은 최소한의 시간입니다.
5) 우리는 성주간 전례를 ‘관객’처럼 구경만 하면 안 됩니다. 성주간 전례는 옛날에 있었던 일을 재현하는 연극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주님 만찬 성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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